764page
766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다. 이날 3백여 명의 주민이 모인 가운데 대회는 당시 연평리장 차두옥(53)과 민 청이 주도했다. 그러던 3월14일, 우도 주민의 절반가량인 1천여 명이 다시 연평 국교에 모여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3·1 경찰발포에 항의하는 성명서 를 발표했다. 그리고 우도 섬 한 바퀴를 돌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가 끝난 후 민청 간부 몇 명이 경찰파견소를 찾아가 삐라를 압수한데 항의하고 파견소 간 판을 불태워버렸다. 당시 우도에는 경찰 3명이 근무하고 있었으나 손을 쓸 수 없 었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2일 만에 비로소 경찰서에 알려져 응원경찰대 15명 이 급파됐다. 그러나 민청 간부 둘은 이미 우도를 떠난 뒤여서 일부 관련 혐의자 만이 검거됐다. 1 우도의 3·1사건은 일단 이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 1948년 3월, 우도지서에 지서장으로 양태수가 부임했다. 지서 경찰 중에 는 서청 출신도 있었다. 지서에서는 주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끌려간 사람들 은 무차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이두삼과 차두옥은 그 후유 증으로 사망하기까지 했다. 연평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8년 3월 23일: 이두삼(43, 남)은 사상범을 집에서 보호했다는 이유로 우도지 서에 잡혀가 고문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함 1949년 1월 2일: 고이정(39, 남)은 오조리에 잠시 나갔다가 성산포 주둔 군인에 게 잡혀 우뭇개동산에서 총살됨 1월 21일: 차두옥(54, 남)은 해방 후 연평리 초대 구장으로 1947년 3월 연평리 3·1기념대회를 주도했다 검거됨. 그는 4월 28일 제주 지방심리원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음. 그 후 1949년 1월 13일, 그는 1948년 12월께 무장대와 횃불신호를 하였다는 이 유로 다시 경찰에 연행돼 취조를 받다 1월 21일 고문치사함 (연 평리–비석-4·3희생자 차두옥 위령비, 참조) 3월 이후: 이두석(42, 남)과 이두홍(26, 남)이 경찰을 피해 도피한 후 행방 불명됨 1)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