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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1948년 5월 9일: 5·10선거를 전후한 시기, 고신생(48, 여)과 김원옥(19, 남)이 마을을 습격한 무장대에 살해됨. 송당리의 첫 희생자임3 12월 3일: 무장대의 세화리 습격 당시 세화에 소개가 살고 있던 고만보 (52, 남)와 김원칠(23), 부성우(37, 남)·조신경(34, 여)·부○○ (2, 남) 가족, 최성순(74, 여)·강달수(54, 남) 가족 7명이 무장대 에 살해됨. 이중에 경찰가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송당 마을 복구는 1949년 5월에 이루어졌다. 현재의 송당리 중동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함바집을 짓고 힘든 재건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성문은 동서남북 네 군 데 두었다. 동문은 송당리 1398번지에 있었고, 서문은 송당리 1319번지, 남문은 송당리 1495번지, 북문은 송당리 1387-3번지에 위치했다. 이어 송당 경찰파견 소도 1351번지에 설치됐다. 그 후 성담경비가 해제되자 주민들은 고향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도 장 기동과 알송당, 가시남동, 너븐밧 같은 크고 작은 마을이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대천동은 상당한 시일이 경과한 후 재건됐지만 그나 마 원주민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송당리는 최후의 무장대원이라 불리는 오원 권의 고향이자 마지막으로 잡힌 곳으로, 인근 체오름이나 성불오름에선 4·3 막바 지까지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전투가 종종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송당리와 교래리 경계지점(교래리 32번지 일대)에는 경찰이 주둔했던 감 발레 주둔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장개발로 사라져 전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정부가 인정한 송당리 4·3희생자는 모두 84명(남자는 64명, 여자는 20명) 이다. 3)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3권, 55∼56쪽: “무장대는 또 보초 서러 나왔던 김원옥(金元玉, 19)을 붙잡아 ‘이장집 가리키라’면서 1구 구장 김인아(金仁兒) 집에 이르자 다짜고짜 대창으로 찔러 숨지게 했다. 무장대는 이날 김두만·김인아 구장 집과 국민회위원장 김군보, 대청단장 고두학, 그리 고 일제시대 구장을 지낸 김완숙(金完淑) 집을 차례로 방화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습격자들의 얼굴이 알려질까봐 애매한 두 사람을 희생물로 삼은 것 같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