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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 남원면 나. 개요. 화생이궤는 신례리와 의귀리 주민 20여 명이 숨어살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에 발각된 양춘생(여, 25)이 학살됐다. 이날은 신례1 구가 소개하는 날로, 경찰은 항애골에서 소개하는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하다 수 십 명을 위미지서로 끌고갔다. 당시 희생자 양춘생은 신례리 정씨의 부인이었다. 양춘생의 도의회 4·3희생자 신고서에는, “사태 당시 남편 정석봉이 위미국교에서 교사를 했기 때문에 경찰의 주목대상이 되어 매일 경찰이 집에 들이 닥치곤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남편과 아들(5세, 정세민)과 함께 3식구는 산으로 피했다. 음력 1948년 11월 11일 군경토벌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남편은 도망가고 애기를 업고 있었던 양춘생은 도망가지 못하고 토벌대의 철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 했다. 죽기 전 양춘생은 업고 있던 애기를 살려주라며 신효 외가댁에 맡겨달라고 토벌대에 애원하자 토벌대원들은 그 애기를 안고 마을에 돌아와 동서(현신봉)에 게 맡겨 살아나게 되었다”라고 진술돼 있다. 당시 그곳에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정세민(1944년생)도 그날을 어렴풋이 기억 하고 있다. “와당와당와당! 이제 다 도망갔죠. 우리 어머니는 나를 업고 그 장소에서 한 2㎞쯤 되 었는가, 그 골짜기에 도달했는데 어머니가 토벌대에 잡혔어요. 어머니가 날 부리자마 자 토벌대들이 창으로 다리 같은 디영 어디영…. 어릴 때 보니까, 막 찔러 죽이는 거야. 그땐 어린 때니까 죽음이 뭔지도 몰랐거든. 게난 우리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이 자식만 은 살려줍써! 이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나에게는 ‘외갓집에 가서 살라!’는 그 말 하고. 어머니는 그때 돌아가셨지요.” 의귀리에서 살다 점차 위험해지자 고모가 계신 신례리로 가족들과 함께 갔던 정신숙(1919년생, 여)은 신례리가 소개하기 바로 전날(1948년 12월 11일), 산으 로 피신했다 양춘생의 가족과 만났다. “오늘 공세미(공천포)로 내리는 날이엔. 공새미로 노리는 날인데 여길 오민 어떵 헙 니껜. 서귀포서 다 오라네 사람을 다 내리렌 헨, 해변더래 내리는데 영 오민 어떵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