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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⑱ 73 義士紀積碑) 등이 가지런히 서 있었는데, 그 가운 데 ‘이십팔의사기적비’ 유래를 듣고는 가슴이 뭉클 했다. 여기에 모신 28의사는 이석용 의병장 부하를 기념하는 비로, 무덤으로 올라가는 정면 아래에는 28개의 돌에 새긴 비석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소 충사 사당에는 그분들 위패가 모셔져 있을 뿐 아니 라, 이석용 의병장 묘지 바로 아래에 합장으로 모셔 두었다. 이명근 회장은 “28의사 가운데는 나이가 어린 소 년 의병도, 스님도 있고, 대부분 손이 끊어진 분들이 라 당신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그분 들의 유해를 모아 이곳에 모두 모시고 합장으로 무 덤을 만들었다”는 유래를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장군에 그 아들, 그 손자’ 라고, 이들 세 부자의 마음 씀이 갸륵해 보였다. 바 람 앞에 촛불처럼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어찌 높고 낮음이 있겠는가. 오히려 일선에 서 몸을 던져 이름 없이 산화한 의병의 애국심과 충 성심이 더 가상치 않은가. 역사는 늘 승자 중심, 장군 중심으로 기록되기에 무명전사들의 넋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 않은가. 당신 아버지(靑菴 李元泳)는 이 비석을 세우기 위 해 요강장수도 하였다는데, 매국노 이완용의 친족 이 아무개가 전북경찰국장으로 부임한 뒤 기마경찰 을 동원하여 그 비석들을 부셔버린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명근 회장은 당신 아버지도 그 일 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당신 증조부(이석용 의 병장 부친)는 임실경찰서에 붙들러 가 수염을 붙잡 힌 채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또 당신 어머니도 수갑 을 찬 채 뭇매를 맞아 기절했고, 당신도 머리를 박박 깎이면서 구둣발길 질로 피멍이 든 채 어머니를 업 고 돌아온 지난 얘기를 하시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나는 이십팔 의사 묘와 이석용 묘에 두 번 절 을 드리고는 차에 올랐다. 의병 집안 삼대의 아름다운 이야기 이석용 의병장 생가는 소충사에서 그리 멀지 않 은 삼봉리 죽전마을로 승용차로 금세 도착했다. 초 가집 옛 모습 그대로이기에 지난날 향수를 불러 일 으켰다. 멀리 고덕산이 빤히 보이는 명당으로 소년 이석용은 날마다 고덕산 멧부리를 바라보며 청운의 뜻을 품었으리라. 다시 성수면 노인회관으로 돌아 온 뒤 이명근 회장을 모시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대구 감옥에서 옥살이하실 때, 아버 지는 당신이 손수 밥을 지어 올리며 옥바라지를 하 셨고,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이후부터 돌아가시던 해 (1983년)까지 머리를 깎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상투 를 한 채 상복 차림으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1940년 4월, 아버지가 할아버지 유허비를 세우다가 왜놈들 에게 밉보여 2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나온 뒤, 할아 버지가 돌아가실 때 일본 놈들이 자기 나라를 건방 지게 '해'라고 한즉, '월출(月出)이면 일몰(日沒)'이니, 당신을 영암 월출산 기슭에 묻어주면 4년 만에 일본 이 망하는 것을 보게 될 거라는 그 말씀에 따라, 산소 를 이장하였더니 놀랍게도 할아버지 말씀대로 일본 이 폭싹 망했다더군요.” 그러면서 당신은 아버지의 효도에 견주면 자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