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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⑯ 73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념하 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 을 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 기산도 의사는 2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재 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 출옥한 뒤에 그는 의병 전선에 뛰어들었다. 유생에서 계몽운동으 로, 의열투쟁에서 다시 의병항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는 고향 전남 장성으로 돌아와 재종조부 인 의병장 기삼연의 뒤를 이어 의병투쟁에 나섰다. 1916년에는 일본 헌병 감시자를 따돌리고,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씨를 찾아왔다. 그는 도화면 당오리를 은거지로 낮에는 머슴살이하 고, 밤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쓰 며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제자 박길용, 기동환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다가 일 제의 삼엄한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일본군 보조(밀정)가 당오리에 몰 래 접근하여 기산도를 사장나무에 묶어놓고 매질로 실신시켰다. 그러고는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키 로 하였으나,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부엌 칼을 감추고 어둑새벽에 물 길어가는 척, 사장나 무 에 접근하여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케 하였다. 1920년,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 지내다가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 기산도의 옷에서 기밀문서(연판장)가 나와 고흥경찰 서로 압송되었다. 일본 경찰이 기산도에게 고진 고 문을 하며 이를 추궁해도 자백치 않았다. 일경은 기 산도를 광주형무소로 이감하여 다시 가혹한 고문을 하자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랐다. 1925년, 기산도는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감하여 고흥 당오리에서 장흥으로 피신한 처 박순임의 도움 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았 다. 1928년 51세로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 焉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碑) 하나만 세워달 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63년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