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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났다. 인명피해도 없었다. 그러다 12월에 들어서자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 작했다. 학련(학생연맹의 약칭) 소속 중학생들이 마을에 들이닥치면서부터였다. “소개를 하기 전에, 학련대라고 학생들이 마을사람 잡아다가 막 때리고 그랬습니다. 죽이지는 않고. 대부분 서귀중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욕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오면 마을에 가정집을 본부 삼아서 잡아다가 대중들이 있는 앞에서 욕을 보였습니다. 중학 생들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어린 아이들이 아니고 당시에는 나이가 좀 있었습니다. 학련대가 오면 잡아오는 사람이 있고, 취조반이 따로 있고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행패 를 부린 것은 아니었는데 촌에 농사를 짓던 우리들이야 법이 이렇구나 하고 생각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목해서 잡아가는 사람은 대게 장년층이었습니다. 젊은 아들을 둔 사람들로 아들이 산에 가담을 한 것 아니냐고 해서, 부부를 잡아다가 때리고 취조하 는 게 일이었습니다.” 또한 마을 민보단과 한청단은 집이 다섯 거리가 이어지는 큰 집이었던 정기량 댁(신례리 1309번지)을 사용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감시했다. 소개 전에는 경찰 파견소도 있었는데 이 파견소는 향사 건물을 같이 사용하다 재건 후 민가로 옮겨 나갔다. 1948년 12월 12일, 신례1구 주민들은 지붕의 기신새 1 를 전부 뜯어 내려 놓고 해안마을인 신례2구 공천포로 소개했다.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진 않았으 나 그때부터 잦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다음은 신례리의 주요 인명학살사건이다. 1948년 12월 12일: 경찰이 소개하는 주민들을 항애골(신례2구)에 집합시킨 뒤 송 만춘(23, 여)을 비롯한 5명을 총살하고 주민 수십 명을 위미지 서로 연행함. 그 후 연행된 사람들은 총살되거나 타지방 형무소 로 보내졌다 한국전쟁 발발 후 행방불명됨 또한 양춘생(25, 여)은 9월께 남편 정석봉(신례국민학교 교사) 1) 초가지붕을 덮은 띠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