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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구좌면 명을 자녀가 산에서 활동한다며 종달리 공회당에서 비석거리 로 끌고가 총살함 (종달리-학살터-종달리 공회당 옛터, 참조) 1949년 1월 19일: 채두만(41, 여)은 남편 김석호가 무장대라며 종달리 염전밭으 로 끌려가 총살됨 2월 10일: 토벌대가 고창용(60, 남) 부부와 윤희선(53, 남) 가족 3명, 채시 병(76, 남) 부부, 현광운 가족 3명 그리고 한인옥(28, 여)과 현 경생(30, 여) 등 12명을 상도리 연두망에서 집단학살함 (상도 리-학살터-연두망(연두골), 참조) 3월 9일: 채신원(여, 57)은 스님으로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항의하다 총살됨2 종달리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컸다. 1948년 9월 임병익(22, 남)이 무장대에 납치 된 후 삼양동 부근에서 살해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48년 12월 4일 새벽: 무장대가 군인으로 위장하고 민보단원들을 공회당에 집합시킨 뒤 총격을 가해 강청삼(37, 남) 등 10명을 사상케 함 (종달리- 학살터-종달리 공회당 옛터, 참조) 1949년 1월 17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초소에 있던 강기유(49, 남) 등 8명이 사망 함.3 이 사건 후 마을에 축성이 시작됐다고 함 정부가 4·3희생자로 인정한 종달리 주민은 127명이며, 남자 96명, 여자 31명 으로 나타나고 있다. 2) 채정옥은 생전에 채신원에 대해, “해녀항일운동을 주동할 만큼 학식있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선 행을 많이 하고 바른말도 잘 했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총을 세 번이나 쏘았는데 죽지 않자 바로 코앞에서 확인사살을 했다 한다. 학살 후 토벌대는 동네사람들에게 모두 나와서 보라고 했다”고 증 언했다. 3) 이날 사건에 대해 현두홍은, “폭도 왔저, 폭도 왔저! 소리가 나서 입초 선 사람들은 그 사람을 따라갔 단 말이야. 그러니 칼을 잡았다가 따라간 사람들을 죽인거야. 자신이 폭도인데 그걸 숨기고 폭도 왔 으니까 빨리 나오라고 허니 사람들이 속아 따라간 거지. 폭도 잡는다고 해 따라갔다가 교회 있는 근 처에서 칼부림이 난 거야. 막 눈 묻은 때라”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