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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당시24세) 화 장 1963년 4월 3일 전북 고창 출생 1977년 인천 석남동 소재 선학알미늄 입사, 야간중학교 입학 1986년 동양튜브에서 임금인상 30%쟁취 투쟁 1987년 8월 1일 산마루교회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여하던 중 동료를 구하고 운명 |14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의 집안은 뼈빠지게 농사짓고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뭐하나 마련 못하는 사무치는 가난을 이기고자 절약과 궁핍 속에 발버둥쳤지만 결코 헤어날 수 없었 다. 이러한 가난을 극복하고자 정든 집과 고향을 등지고 인천에 정착했다. 그리고 ’86년 초반 진흥요업에서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대하며 임금인 상 30%, 보너스 10% 쟁취, 그 외 근로조건 개선 등 투쟁을 주도하였고, 이러한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찾고 노동자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동료와 하나로 뭉쳐 단결을 다지고 자본가와 한치의 타협 없는 싸움을 전 개하였다. 그 후 동지는 선창산업에 입사해 변함없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동료들과 함 께 노동자로서 올바른 삶을 결단하여 토론과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동 지의 인간적인 면과 불굴의 투쟁정신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동지에 대한 한치 의 변함없는 의리는 다른 동지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부모님께는 효자로서 믿음직한 막내이며, 동지의 삶은 부모님으로 하여금 힘을 주었고 흐뭇하게 하였다. 동지의평상시그런모습과삶은수련회에서도참가한동료들의모범이되었다. ’87년 8월 1일부터 3일까지 매포수양관에서 열린 인천기노련 주최‘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서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 속에 수련회에 도착한 270여명의 노동형제들은 조 편성과 방 배정을 마치고, 뒤 순서인 물놀이에 들어 갔다. 불과 1주일 전 답사 때는 위험표지판도 없었고, 물살은 빨랐으나 깊은 곳이 라야 가슴을 넘지 않았기에 물놀이를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물놀이 장소의 바로 옆에 얼마 전에 불법골재 채취 작업을 하여 깊은 웅덩이가 파여 있는 것을 몰랐 던 일행 중 한명이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한 3명의 노동자가 뛰어가 1명을 구했으나 그중 구하러 들어간 두 명이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 작했다. 이에 수 십명의 노동형제들이 인간 사슬을 만들어 구출하였으나, 동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동지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동료들을 구해내고 운명하였다. 끝내살리라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