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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1948년 11월 7일, 토벌대가 불시에 들이닥쳐 마을을 초토화했다. 토벌대는 집 집마다 불지르고 다니면서 거동이 불편해 집에 있던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을 총살 했다. 이날 마을에서는 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후 해안마을로 연고자를 찾 아 소개 간 일부 주민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주민들은 마을 인근 숲이나 하천에 있 는 제한이곱지 같은 궤에 숨어 죽음을 넘나드는 힘든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그러 나 날이 갈수록 토벌대의 추적은 집요해졌고 주민들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머체왓이나 고냉이든밧 등지에 숨었다. 일부 주민은 그러다 발각돼 총살되기도 했다. 다음은 한남리 주민들이 학살된 주요 사건이다. 1948년 11월 7일: 토벌대가 한남리를 급습해 마을을 불태우고 고봉화(70, 남) 일 가족 4명을 비롯한 8명을 총살함 12월 9일: 오두호(38, 남)를 비롯한 오한수(31, 남), 현원희(23, 남) 3명이 태흥리 세수개 부근에서 토벌대에 총살됨 1949년 봄이 되자 토벌대는 대대적인 귀순공작을 벌였다. 비행기로 삐라를 뿌 리기도 하며 귀순하면 살려주겠다고 산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때 까지 산에 숨어 살아남은 한남주민들도 군부대나 경찰지서로 귀순했다. 그러나 생명은 보장한다는 말과 달리 젊은이들 대부분은 재판을 받고 타 지방 형무소로 보내졌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형무소에서 집단처형됐다. 형무소에서 용케 살아 돌아온 주민들도 그 후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한남주민 고아무개는 형무소에서 7 년의 형기를 마치고 1950년대 중반에 고향에 돌아왔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경 찰의 감시와 폭행, 그리고 주민들의 냉대를 견디다 못 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 았다. 한편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 남원리나 의귀리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주민 들은 1953년 7월 들어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우선 마을을 둘러 축성잡업을 벌였다. 현정자는, “4·3사건으로 폐동되었던 한남리를 재건하는 사업이 시작되면 서 날마다 성담을 쌓는 부역을 나갔다. 성담이 완성되어 주민들이 서로 돌아가면 서 마을 보초를 서야 했다. 나도 저녁마다 망대에서 보초를 섰다. 한남리 마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