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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⑱ 71 탁하자 남원 표를 주었다. 나는 2007년 가을부터 호남의 곳곳을 누비고 있 었다. 그 흔한 승용차도 없이 묵직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카메라를 둘러멘 채, 시외버스로 열차로 동가 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고 있었다. 15: 43, 정시에 순천 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는 한 시간 정도 달린 끝에 남원 역에 닿았다. 남원에서 일박을 하고 이튿날, 오전 8시 20분 행 임실 경유 전 주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제 시간에 출발하는데 승객은 나 혼자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밥줄 떨어질 것 같아 걱정이구먼요.” 버스 기사는 임실로 가면서 이런저런 세태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가면 농촌은 곧 텅 빌 것”이라는 둥, 한 시정인(市井人)으로 우국 지정을 한껏 쏟아놓았다. 오수라는 곳에 이르러 대 여섯 승객이 오르자 그제야 나와 기사의 대화는 끊 겼다. 나는 그제야 이석용 의병장 행적을 살피고자 가방 속의 자료 유인물을 꺼내 펼쳤다. 하늘에는 항상 해와  달과 별빛이 비치지만 내 가슴 속에는 일편단심 나라를 구하는 것뿐이다. 천추에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죽는 일이요 이것만이 나를 편안케 하는 것이다. - 이석용 의병장이 대구 옥중에서 읊은 마지막  시 차창 멀리 임실 들판에서 이석용 의병장 환영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반기는 듯하다. 솔직히 나는 이런 아름다운 고인과의 만남 때문에 이 길을 걷고 있다. 이 어른들의 영정을 대하거나 말씀을 들으면 잦아든 내 가슴에도 피가 끓는다. 한말 구국운동인 의병전쟁은 망해 가는 나라를 구 하기 위해 민중들이 오로지 불타는 애국심에서 맨주 먹 하나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따라서 그 승패는 처 음부터 불 보듯 뻔했다. 그 점은 의병 자신들도 잘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추 호도 굴복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대구감옥소에 수감 중일 때  이석용 의병장   이석용 의병장 아들  이원영 선생(이명근 제공)     손자 이명근 선생(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