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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⑯ 71 하남리에서 행주 기씨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맏아 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깨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16세 때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사위가 되었다. 그 는 기독교 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고향 장성에 자강 회(自彊會)를 조직하여 인재를 모아 양성하며 그들에 게 무력 투쟁의 투지와 정신력을 길렀다. 1904년, 박관호 등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 켜 장성 광주 간 고개에서 일병(日兵)과 싸우기도 했 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기산도 의사는 상 경하여 이범석 · 서상규 동지들과 ‘매국 원흉 암살단’ 을 조직하였으나 거사를 앞두고 일본 헌병에게 발각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도 발설치 않아 한 달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06년 2월 16일, 구완희 · 이세진 동지와 함 께 을 사오적의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 집을 밤 12시 무렵 습격하였다. 이근택은 이날 밤 11시 무렵에 침 실로 들어갔다. 그의 첩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기산도 일행 셋이 들어가 한 명은 이근택의 팔 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은 칼로 이근택을 마구 찔 렀다. 이근택이 이때 재빨리 방안의 촛불을 끄자 일 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선혈이 낭자하도록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 는 못했다. 이근택과 첩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하 인이 달려오자 일행은 하인의 배와 얼굴, 다리 등 4 곳을 찔렀다. 이어서 집안을 경비하던 병정 6명과 순 검 4명이 달려왔다. 일본 헌병과 순사도 이근택의 집 에 설치한 경종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하지만 기산 도 일행은 이미 남쪽 담에 미리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탈출한 뒤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보도 하였다.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기산도 선생이 가입해서 활동했던  ‘자신회’ 회원들(연합뉴스 제공) 집 앞에서 필자 일행을 전송하는 기노식 씨 내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