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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 남원면 라. 내력비 <앞면> 현의합장묘 내력 전대미문의 비극 ‘4·3’은 기어이 이곳 한라산 남동쪽 자락에도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의귀리 약 300명, 수망리 100여명, 한남리 100여 명 등 수많은 인명이 사 태 중에 희생되었고,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80여명의 주 민이 한꺼번에 학살되는 참사까지 발생했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의귀·수망·한남리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다른 지역보다 열흘 쯤 앞선 1948년 11월 7일부터 시작됐다. 토벌대는 이곳 중산간 지역에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 경비대 제2연대 1대대 2중대는 수색 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 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 별 고문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학살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는 이들 주민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 해 1949년 1월 10일(음력 1948년 12월12일) 새벽 의귀국민학교를 습격했다. 하 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토벌대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 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명은 1월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동쪽 약 200m 지점(의귀리 1506-6번지)의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양민들을 보복 살해해버린 것이다. 학살 현장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빨다 지쳐 쓰러져간 갓난아 기의 넋도 있었다. 시신들은 원만한 수습조처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는 유족이 거 두어간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 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 해 봄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이 의귀리 중심지에 성 을 쌓게 되면서 한남리 민보단원들에 의해 ‘개탄물’ 동쪽(의귀리 765-7번지)으로 옮겨졌다. 세 개의 구덩이에 던져져 ‘멜젓 담듯’ 매장되고 만 것이다. 사태가 끝나자 유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점차 묘역을 가다듬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