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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2025년 4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곁에서 줄곧 지켜보던 기산도 의사 며느님이 그 사진틀을 다시 벽에 걸면서 한 마디 했다. 날씨도 포 근하고 볕이 좋아 나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녹음기 를 켜자 두 내외는 금세말문을 닫았다. 나도 호남말 투로 말했다. - 요것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씀 하시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지 않는 그들 내외는 녹음 기를 의식한 듯,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녹음 기를 껐다고 하고서는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별 일 다 겪었소” - 어르신 살아온 얘기나 들어보려고 합니다. “아이고, 좌우당간 우리 아버지 땜시로 참 별 일 다 겪었소. 그 일들을 어찌 다 말하것소. 당신도 그랬지 만, 가족들도 평생을 왜놈들에게 쫓겨 다녔소. 내가 태어나긴 장성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서는 왜놈 등살 에 살 수가 없어 경상도 통영으로 쫓겨 갔고, 거기서 도 오래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살다가 내가 일곱 살 때 여기 고흥으로 왔구먼요. 여기 와서 도 아무 것도 없어 내도록 남의 곁방(셋방) 살다가 계 우 이 집을 마련했구먼요.” -기산도 의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아주 독한 사람이었어요. 왜놈들이 우리 아버지 를 잡아다가 열 손가락 손가락마다 못질을 해도 항 복을 하지 않았고(기록에는 여덟 손가락으로 나옴), 당신 이빨로 셰(혀)를 잘라 일부로 벙어리가 되어서 까지도 동지들을 불지 않았어요. 나는 학교라고는 통영에서 한 열흘 다니다가 왜놈들에게 쫓겨나 더 다니지 못해 무식하고, 이제 나이도 들어 (기억도) 오 락가락 하니까 이걸 보면 우리 아버지 얘기가 다 나 오니까 가져가시오.” 기산도 의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든 작은 책자였다. - 남다른 아버지를 둔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소싯적은 물론, 얼마 전까지도 원망 많이 했지요. 그래도 핏줄이라 내가 군에 있을 때, 한탄강에서 빠 져죽을 지경이 된 적이 있었구먼요. 그때 하늘에다 가 빌었어요. 나를 살려만 주신다면 우리 아버지 유 언인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 度之墓;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의 묘)”라는 말씀을 나무 비에라도 새겨 꼭 세우겠으니 그 뒤에 데려가 라고. 이제는 우리 동네에다가 돌비석을 세워드렸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구먼요. 우리가 남다른 고생 은 했지만, 몸뚱이가 반신불수가 되고 셰(혀)까지 자 르고 평생을 거지 생활을 한 아버지 고생에야 어찌 견주겠소. 우리야 아버지 덕분에 좋은 시상(세상) 만 나 이제는 끼니 걱정 않고 사니까 고맙고 고맙지요.” 나는 애초 고흥에 찾아갈 때는 하룻밤 잘 각오까 지 했으나 취재가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 그래서 취 재 후 곧장 일어서자 기노식 씨 내외는 귀한 손님을 맨입으로 보낼 수 없다고 장터 마을로 안내하려는 걸 극구 사양하고 차에 올랐다. 그들 내외는 우리가 마을을 떠날 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기산도 의사 행장] 기산도는 1878년 10월 16일 전남 장성군 황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