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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5월31일 토요일 7 (제221호) 특 집 목조건물(齋舍)화재·해충걱 정끝 보장(AS)5년 조상의얼과혼이담긴목조문화재지킴이가되고자평생을걸었습니다. ㈜세림경도방재는모든역량을동원하여방염방충액을개발하여2012년문화 재청으로국내최초KD-500에이어 최근KD-600을한번더인증받았습니다.한번시공으로30년을븣 목조문화재이제화재와해충으로부터안전하게지켜드리겠습니다. 시공문의:대표박용태(밀성박씨 행산공后)010-2514-7175뱚 숭례문 나주향교 수원팔달문 △목은(牧隱)이색(李穡)묘소 충남서천군기산면영모리1-8,이색의묘는기린산(145.5m)중 턱 남사면에 자리한다. 좌향(坐向)은 남향이다. 풍수지리(風水地 理)에의하면기린(麒麟)이내려와풀을뜯어먹고있는‘기린하전 (麒麟下田)’형국의명당이라고하며무학대사(無學大師)가 점지 한곳이라전해진다. 봉분(封墳)은 원형(圓形)이며 뒤편에 꼬리[龍尾]가 이어져 자 연둔덕과연결된모습이다.봉분전면에는2단의계체석(階 휼 石) 이 설치되어 있다. 봉분 전면 1단 계체석 아래로 상석(床石)이 배 치되어있고좌우에망주석(望柱石)이세워져있다.2단계체석아 래는경사가급하게이어지는데좌우에문인석(文人石)과석마석 (石馬石)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 전면 우측에는 ‘목은 선생이색지묘(牧隱先生李穡之墓)’라 새겨진 묘비(墓碑)가 세워 져 있다. 이색의 묘 바로 아래에는 3남 이종선(李種善)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1993년 11월 12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역면적은1,150㎡이며한산이씨(韓山李氏)종중에서관리를하 고 있다. 1988년 후손들이 신도비를 새로 조성하였으며 현재 문헌 서원광장에세워져있다. 이색의 묘는 봉분과 묘역 구조,석물(石物)등이 후대에 정비되 어본래의모습은많이남아있지않으나고려후기대학자이색의 생애를 엿볼수 있는유적이고묘역 아래문헌서원 동쪽언덕에는 이색의 조부 이자성(李自成)과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가 자리한다. 이색(李穡)은 본관이 한산(韓山),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 정(文靖)이다.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은 1396년(태 조 5)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여주로피서(避暑)가는중에병사(病死)하였다는기록도 있으며, 독살(毒殺)설이 제기되는 등 이설(異說)이 있다. 목은의 셋째 아들 이종선(李種善)이 한산으로 영구(靈柩)를 모셔와 건지 산(乾至山)아래,현재묘소에장사지냈다. 3일째되는23일에는부여은산문중선영과백제의자왕과태자 부여융의 제단, 백제문화단지 내 사비궁, 후백제 견훤 왕릉, 논산 가야문중선영,관촉사일주문과은진미륵,돈암서원,계백장군묘 소,명재윤증 고택,김종서 장군묘소,세종봉암문중등을 돌아보 았다. △ 백제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제단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 16-2에 위치한 백제 시기에 조성 된 대형 고분군이다. 예전 명칭은 븮능산리 고분군븯이었지만 븮백제 왕릉원븯이라고부르기도한다.2021년 9월 17일 문화재청 고시제2 021-112호로공식명칭이븮부여왕릉원븯으로변경되었다. 바로 옆에는 백제금동대향로 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 사지와 사 비의 외곽성에 해당하는 부여 나성이 있다.능산리 고분군의 입장 료를내면모두관람이가능하다.크게3개의무덤군으로이루어져 있으며사비시대의백제의왕릉군으로알려져있다. 중앙에 7기의 왕릉 급 고분과 동서로 다수의 왕족과 귀족 들의 무덤이함께위치해있다. 발굴 조사 이전에 모두 도굴 되어 소수의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일반적으로 전북 익산시 쌍릉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무왕과 중 국허난성뤄양시에묻힌의자왕을 제외한모든 사비시대 백제왕 들은이곳에묻혔다고추정하고있다. 물론 무령왕릉의 지석처럼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무덤의 시 대별 양식변화나 출토품의 양상을연구한결과정황상그렇게 추 정하는것이다.1963년1월21일대한민국의사적으로지정되었다. 또한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 회(World HeritageCommittee)에서 공주·부여·익산 일대에 분포 한백제의다양한유적들과함께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명칭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등재되었다. 능산리 고분군 입구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백제의 마지 막왕인의자왕과그의아들부여융의가묘가나온다.해당묘역에 있는무덤중백제당대가아닌현대에백제양식을참조해새로만 든둘뿐인무덤이다.북망산에묻힌이들을지방자치단체차원에 서유해귀국하려고시도했던흔적이라할수있다.의자왕이이곳 에돌아와다시잠들기전까지는참많은일들이있었다.( ※의자왕 에대한자세한이야기는의자왕참조)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뤄양 성 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한다.1920년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 이 먼저 출토되었고 후에 1995년 부여군은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무덤을찾고자하였다. 결국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 정되는 곳을 확인하는데 성공하였다.하지만 시신,목관의 흔적과 지석은찾을수없었다.의자왕묘역만그런것이아니라당시북망 산은 이미 오랜 중국의 혼란기를 거치며 도굴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중국은 동릉 도굴 사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당장 관리 인 력이 상주하고 있던 청나라 황제릉도 군벌이 폭탄을 동원해 도굴 할정도로극심한혼란기를거쳤다. 의자왕바로옆에묻혔다던오나라의마지막황제인손호나,진 나라의군주 진숙보의 무덤에도굴갱이훤히뚫려 있었으니진짜 의자왕릉은 어떻게 되었을지 뻔하다. 결국 중국으로부터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 복제품과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퍼서2000년에한국으로가져왔고이후부여고란사에봉안하였다 가 능산리 고분군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 고백제의 장례방식으로묘지 신에게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매 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을 관과 함께 각각 의자왕릉과 부여융 묘 에매설하였다.의자왕이백제를떠난지1,340년만에선대왕들과 나란히같은장소에묻히게된것이다. 의자왕의무덤에는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 라는 비석이, 그 옆에 있는 부여융의 무덤에는 백제국부여융단비 (百濟國王扶餘隆壇碑)라는비석이세워져있고두사람의간략한 일대기가써있다. △논산가야곡문중선영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종연리 산 105, 해백공 손자인 현감공파 산하 논산가야곡 문중은 해백공 7세손 일립(逸立)이 입향조로 종 원수는약600명이며매년음력10월첫째일요일에2년전새롭게 조성된이곳집단묘역에서세일사를봉행하고있다. 입향조휘일립(逸立)은통덕랑으로증(贈)동추(同樞)인휘승 종(承從)의아들형제중차남으로형조좌랑이로아들성국(城國) 을 낳았다. 이날 유적탐방에는 해백공파 중앙종친회 사업담당 부 회장인종량(鍾良)이문중장으로이날다른문중보다는영접종원 이많았다. △돈암서원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 1)의 강학 기반을 배경으로 건립된 서원이다.황강 김계휘가 건립 한 정회당과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에서 수학한 김장생의 제자 들이 후에 스승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하여 돈암서원을 건립하였 다.서원내에는사당인숭례사와강당인응도당,정회당과양성당, 산앙루,장판각 등 다수의 건축물과 돈암서원의 연혁을 밝힌 원정 비등의문화재가남아있다.그중응도당은고대의가옥제도를전 범으로하여지은건축물로유명하다. 2019년7월6일아제르바이잔의바쿠에서개최된제43차세계유 산위원회에서돈암서원을비롯한‘한국의서원’9개소를세계문화 유산으로등재결정하였다. 당시한국의서원은조선후기교육및사회적활동으로널리보 편화되었던 성리학의증거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 dingUniversalValue)’를인정받았고,각각의서원마다세계유산 으로서의진정성과,완전성,보존관리계획등도충분한요건을갖 추었다고평가받았다. △명재윤증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 宅)은최근윤석열대통령의선조라하여많은사람들이찾는조선 시대의 가옥이다. 1984년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윤증 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으로지정되었다가2007년1월29일논산 명재고택으로문화재지정명칭이변하였다.조선숙종때의학자 인 명재 윤증(1629~1714)의 자녀와 제자가 윤증을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집이다.집앞에는넓은바깥마당이있고그앞에인공연 못을파고가운데에원형의섬을만들어정원을꾸몄다.또한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 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하며 그 세부 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최근보수공사중숭정기원후4정미(1847년)상량문이발 견되었다.) △세종봉암문중선영 세종시 연서면 쌍류리 26-3,해백공 넷째 아들인 호군공파 산하 세종봉암문중은해백공막내아들로부호군을지낸명(蓂,1513~? )의장남인원공(光元이입향조로종원수는약310명이며매년음 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연서면 봉암리 집성촌에 있는 재실(崇朝 齋)에서세일사를봉행하고있다.이묘역은연기군봉암리집성촌 인근 야산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편입되어 이곳으로 이장해 집단묘역을조성하였다. 부호군은 휘 명(蓂)은 증 통정대부 부호군으로 슬하에 아들 원 광·용원둘을두었는데이곳세중봉암문중의입향조는장자이다. 마지막날이다.홍성장곡문중,면암최익현선생묘소,예산광시 문중,예산차동문중,공주유구문중,규정공후35지파의한분인연 안공 묘역, 아산맹씨 행단과 맹사성의 동상을 들러보고 대단원의 막을내리며안전하게귀가하였다. △홍성장곡문중 충남홍성군장곡면월계리494-1,해백공손자인부사공파산하 홍성장곡 문중은 해백공 6세손 승필(承弼)이 입향조로 종원 수는 약400명이며매년음력10월둘째일요일에이곳에새롭게조성된 집단묘역에서세일사를봉행하고있다. 입향조 휘 승필(承弼)은 부사공(휘 승건)의 손자 부사직 음 아 산현감인 휘 윤동(潤東)의 아들 형제(승필·응필) 중 장남으로 사 헌부장령을지냈다. △면암최익현선생묘소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4-1, 1982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최익현은경기도포천에서출생해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공부한후,1855년(철종6)에문과에급제하였다.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해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자 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해 대 원군이하야하는계기가되었으며,민씨일족의옹폐(壅蔽:웃사람 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비난 상소,병자수호조약 체결 반대 상소 등으로제주도·흑산도등지로유배당하기도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상소를 통해 시폐의시정과항일척사운동에앞장섰다.을사조약이체결되자1 906년74세의고령으로의병을일으켜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對馬島) 옥사에 서 순국하였다.최익현의 묘는 본래 1907년에 논산시 노성면의 국 도변에 마련했었다. 그러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일제의 명령으 로 1910년에 오지인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되었다. 최익현 선생의묘 좌측으로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방형의화강석재 대 좌와오석의비신,옥개형의화강석재이수로구성되어있다.묘의 앞에는석상이놓여있으며묘역의앞좌우로는높이1m정도의석 주를세우고있다.또한묘의입구에는1973년4월9일예산모현사 업회(慕顯事業會)에서건립한최익현의춘추대의비가서있다. 이춘추대의비는화강석재의대좌와이수,오석의비신등3매의 별석으로이루어져있다.대좌는방형의지대석위에두단이올려 져 있고, 이 대좌 위에 ‘勉菴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 李瑄根 撰, 金 基昇 書(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이선근찬김기승서)’라는 각 서가전면에새겨진비신이올려져있다. 비신의위에는두마리의용이 여의주를물고있는 모습을표현 한이수가올려져있다.대의비의주변은잔디를깔고철책으로보 호시설을 해서 깨끗이 보호되고 있고 뒤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조 성되어있다. △ 예산광시 문중 선영 충남예산군광시면서초정리산91,휘승희(承熙)의묘소가있 다. 해백공 손자인 도사공파 산하 예산광시 문중은 해백공 8세손 홍석(弘錫)이입향조로종원수는약1,500명이며매년음력10월1 2일에이곳에서세일사를봉행하고있다.해백공파중앙종친회문 화담당 부회장 종화(鍾和)가 문중장이며 재무이사 상성(商成)이 이문중소속이다. 입향조 홍석(弘錫)은 묘소가 있는 휘 승희(承熙)의 차자 휘 세 적(장자 세일은 무후)의 장자로 1664년에 태어났다. 묘소의 주인 인휘승희공은통덕랑이다. △ 예산차동 문중 선영 제단 충남예산군신양면차동리239-1,해백공손자인청강공파산하 예산차동 문중은 해백공 9세손 대원(太源)이 입향조로 종원 수는 약600명이며매년양력11월둘째토요일에이곳에서세일사를봉 행한다. 청강공의 휘는 제원(悌元)으로 호는 청강(晴岡)이다. 향 천(鄕薦)으로 통정대부에 가자 되었다. 입향조 휘 대원(太源) 청 강공의5세통덕랑지석(枝錫)의장남이다. △공주유구문중선영 충남 공주시 유구읍 신영리 산 17-1은 휘 봉현(奉賢)묘소이다. 해백공손자인청강공파산하공주유구문중은해백공4세손봉현 (奉賢, 1564~1593)이 입향조이다.그는 어해장군 행 충무위부사과 임진왜란에 종사관으로 참전해 30세로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안 적(安迪)은 수직으로 통정대부 이조참의이다. 종원 수는 약 2,000 명이며 묘소는 원래 청양군 정산면 해남리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이장해 매년 양력 11월 둘째 일요일에 집성촌인 길 건너 입석리에 있는재실(追遠齋)에서세일사를봉행하고있다.해백공파중앙종 친회총무이사성춘(性春)이이문중소속이다. △연안공(承祖)묘역 세종시 소정면 대곡리 산 73-1,규정공파 산하 연안공파는 규정 공 14세손으로 파조는 연안부사를 지낸 승조(承祖, 1564~1640)이 며매년음력10월2일에이곳에서세일사를봉행한다. 연안공파의 파조인공의 자(字)는효선(孝先)이고호는지지당 (止止堂)이다.공은1564년(명종19·갑자)5월에지돈령공(知敦寧 公) 안세(安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니 승종(承宗)의 아우요 관 원공 계현(啓賢)의 손자이며 낙촌공의 증손이다. 외조는 판서 황 림(黃琳)이고 배위는 초취부인(初娶夫人) 남궁씨(南宮氏)로 직 장(直長)식(湜)의 따님이었으나 소생이 없이 조졸(早卒)하여 후 취부인(後娶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를 맞이하니 사헌부 감찰 (監察)극인(克仁)의따님이다. 공은선대가문의공훈으로광능참봉(光陵參奉)을시작으로만 경리(萬經理)아문도감(衙門都監),낭청(郞廳),한성참군(漢城參 軍), 상의주부(尙衣主簿)를 지내고 삼등현감(三登縣監), 안산군 수(安山郡守)를 역임하고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지냈는데 이때 의 치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17년(광해 9·정사) 에 연안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 겸 해주진병마첨절제사(海州鎭 兵馬僉節制使)로 나갔다가 1618년(광해 10·무오) 봄에 친환(親 患)으로벼슬을사직하고도성으로돌아와간병하던중이해4월2 2일(윤 4월이 끼었음)에 아버지 응원군(凝原君)께서 하세하여 5 월초에고양시두응촌선영하에장사하여모시었다. 선고(先考)께서 졸하신지 두 달도 채 아니 되어 5월 7일에는 모 부인 정경부인 창원황씨(昌原黃氏)마저 하세하시니 당시 풍수가 (風水家)의말을들어충청도천안(天安)땅대곡리(大谷里)한적 골뒷산갑좌(甲坐)언덕에모시었다.상사(喪事)가이러하였으니 사형(舍兄) 좌찬성 대감은 두응촌 선영하 응원군 묘소에서 시묘 (侍墓)살이 하였고 공은 천안 땅 대곡리 한적골 모부인의 유택에 서시묘살이끝에식솔마저불러내려은거하다가1640년(숭정13· 경진)8월 16일에 하세하니 향년 77세요 이로부터 천안 한적골 박 씨(朴氏)의 뿌리가 시작된 것이다.공은 처음에는 천안 땅 한적골 은적산(隱跡山)언덕에장사모셨다가1726년(영조26·병오)봄에 충청도 연기군 남면 모항리(茅項里)간좌(艮坐)언덕으로 이장하 였으나, 2006년(병술) 10월 29일에 다시 대곡리 한적골 뒷동산 묘 좌(卯坐) 언덕으로 옮겨 모시니 공의 묘역 일대가 신행정 복합도 시로변모하여수용됨에서였다. 규정공후35지파의월봉공묘역에서 2025.2.23.부여은산문중,논산가야문중, 세종봉암문중선영 2025.2,25.홍성장곡,예산광시,예산차동, 공주유구문중,세종연안공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