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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9월30일 금요일 7 (제189호) 기 획 퇴락재공의 손자 언배(堰培)의 호는 일심헌(一心軒)으로 1 627년 후금(後金: 청나라)이 쳐들어와((丙子胡亂) 나라가 풍 전등화의 경각에 놓이자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써 당시 전 라감사였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막하(幕下)로 들어 가 청 주 (淸 州 ) 및 황 주 (黃 州 ) 로 진 격 , 수 많 은 접 전 을 벌 려 오 랑캐를 토벌했다. 그러나 1632년 안주싸움에서 명나라 장수 모승록(牟承祿)과 연합전선을 펼쳐 적장 유흥치(劉興治)을 토벌하다3월17일순절했다. 이에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는 남편이 전장에서 순절했 기에 초혼을 불러 장례를 치르는 초혼반장(招魂返葬)을 한 후, 2살 난 아들(박일립 1629~1696)을 시숙들에게 부탁하고 자결, 남편 뒤를 따른다. 옥과읍지(玉果邑誌)와 호남절의록 (湖南節義錄)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유서엔 “지아비는 나라 를 위해 목숨을 받쳤거늘 나는 누구를 위해 살리오.살아 지아 비의 충성된 뜻을 더럽히느니 지아비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 소원이로소이다”라고 적혀있다. 이러한 사연은 급기야 1805 년 옥과현감 윤정진과 성사묵 어사, 신응조 판서 등이 기록하 고 도내 유림들이 충절과 순절을 조정에 품고(稟告)했다. 이 를 받아 든 순조대왕은 “이는 기울어 가는 윤강(倫綱)을 붙들 고, 백세(百世)에 교화(敎化)를 이룩한 것이다”며 동몽교관 (童蒙敎官)과 선무동종3등(宣武東從三等)을 추증하고 충열 문(忠烈門)이라는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옛 사적(史籍) 들을 들추어 볼 때,한 가문의 부부가 충(忠)과 열(烈)을 함께 한사례를들어국가로부터사우(祠宇)을하사받은경우는그 리 많지 않다. 그러기에 충열문에 대한 후손들의 긍지는 대단 하다.1969년 전라남도제51호지방문화재로지정되었다. 퇴락재공의 아우 금흥(錦興)은 장사랑 기자릉참봉이고 그 의 아들언신(彦信)은선무랑군자감주부및 수문장이다.옥과 에서 광주로 이거하였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고경명 장군 휘하에서군량과군기(軍機)를모아전달하고무수한적을참 수(斬首)하였으나 역부족으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여 1606 년어사공신록에등재되었다. 참판공(휘 맹우)의 셋째 아들 해(垓)는 돈용교위이다.계부 (季父) 한림공으로 인해 형제(兄弟) 자질(子姪)이 모두 각처 에서 피화 되었으나 공은 당시 10세로 유소년을 위해 특별히 용서(容恕)를 받아 영동에 잔유(殘留)하면서 계부(季父)의 옥시중을들었다.공이영동에서황간상촌으로이거하였다. 난계공의 차남 중우(仲愚)는 직장과 통훈대부 병동군수를 지냈다.동생 한림공의 순절(殉節)에 연좌되어 전주에 안치되 었다. 아들 은(垠)·용(墉)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은(垠)은 선 교랑 현감으로 계부 한림공으로 인해 화가 미칠까 두려워 청 도 풍각으로 피신하였다가 신원후에 충북 옥천으로 이거 하 였는데 장자 수영(秀英)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청정에 이 르러청도에서창원내서면으로이거하였다. 난계공의 삼남 계우(季愚)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 사를 역임하였다. 단종 선위시에 사육신 및 안평대군과 김종 분 등과 더불어 단종2년(1445)8월에 순의(殉義)하였다.정조 15년(1791) 가선대부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부총관에 증직 되었다. 장릉정단에 배향되었다. 아들 운(芸)·중양(重陽)·조 ( 틘)·붕(鵬) 사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운(芸)의 호는 모당(慕 堂)으로 1453년 16세의 나이로 선고(한림공)께서 화를 당함 에 연좌되어 충청도 당진군 해도에 유배되었다. 아들 둘을 두 었는데 장자 항(恒)이고 차자는 신(愼)으로 아들 효생(孝生) 이 증조부로 인해 가화(家禍)를 당함으로서 세사(世事)뜻을 두지 않고 강호(江湖)를 유람하다가 산수를 좋아하여 호남에 세거지(因居)정했다. 한림공의 차자 중양은 합천 야로에 인거(因居)하다 이후 후 손들은 김천 등지로 이거하였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지난번 보사(譜事)에누보되기도하였다. 한림공의 셋째 조( 틘)성균 진사로 그의 아들 원구(元龜)의 후손들은 연락이 없고, 차자 정신(庭臣)은 영동에서 전남 담 양으로이거한후후손들은광주로이거하였다. 한림공의 넷째 붕(鵬)은 가화(家禍)로 인해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였다.아들원린(元麟)은주부이고그의 후손들은남원 에세거하다광주,정읍등으로이거해갔다. 국당공은 한성판윤 휘 천귀(天貴)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이 다. 휘는 흥생(興生) 字는 경부(敬夫)이고 호(號)는 국당(菊 堂)이다. 고려 공민왕조 1374년 갑인(甲寅)에 태어났다. 13세 에 진사에 오르고 17세에 생원시에 급제하는 등 뛰어난 학문 에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럼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 고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1351~1413, 두문동72현) 선생 문하에 나아가니 선생은 공을 보고 젊은 사람이 학문이 밝다 면서 문하에 두기로 허락하자 목은 이색 역시 공의 밝은 학문 과 높은 행의를 천양하였으니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학하 는사람은의정김훈,사인서호및종제대제학난계등이다. 처음 여흥(驪興)과 춘천(春川)의 교수관이 되어 학도(學 徒)들을 자상(仔詳)하고 분명(分明)하게 가르치니 많은 사람 들을 계몽(啓蒙)시켜 학문은 깨끗하고 올바르니 선비들은 기 꺼이심복(心腹)하여소문을듣고찾아와수업을청하는사람 이점점늘어났다. 세종 5년(1423) 계묘(癸卯)에 창평 현령에 제수되어 청렴 과 근엄(謹嚴)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도민 을다스리며재판에밝고신중하였다.익년친상(親喪,아버지 喪)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가하여 아우 감찰공(이요당) 과함께시묘3년을마치고그후는명리(名利)에뜻이없었고 정신이 산수간에 있어 마침내 이요당과 쌍청루를 심천 고당 (高塘)에 짓고 한가하게 살다가 여생을 마칠 처소를 삼고 다 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손자 암(巖)이 귀하게 됨으로 성종조에통정대부공조참의에증직되었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인번(仁蕃)은 찰방공(察訪 公), 차자 인정(仁挺)은 함창공(咸昌公) 셋째 인석(仁碩) 참 판공( 핫判公)파고 각각 분파하며 복야공파에서 다수를 차지 하며제일번성하였다. ▲찰방공파(察訪公派) 국당공의 장자이며 휘는 인번(仁蕃)으로 국당공의 두 부인 중 첫 번째인 충주양씨 소생이다. 진사시에 올라 연원(連原) 찰방(察訪)을 지내고 손자 세국(世國)을 데리고 영동에서 김 천 대덕면 감주리로 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평(坪)은 사직(司直)이고,차남 균(均)은 연산 현감을지내고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셋째 숙(塾)은생졸과 행록(行錄)이전해지지않는다. 사직공(휘 평)은 아들 회(檜)가 무과에 올랐으나 조졸하여 참판공 후(后) 엄(嚴)의 아들 유근(有根)으로 후사를 이었는 데관은 사직(司直)으로 아들 넷을두었는데장자연종(連宗) 은 부사직(副司直), 차자 대종(大宗)은 학생, 셋째 치의(致 義)는후사가없고,넷째진종(振宗)은주부이다. 찰방공의 차자 균(均)의 아들 세국(世國)은 호(號)는 청계 (淸溪)인데 가선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받았다. 손자 술(述)은 가선대부 절충장군 용양위 부후군 겸 중추부사를 역임하였 고,증손대복(大復)은가선대부동지충추부사이다. 찰방공의 셋째 숙(塾)의 행장은 전해지지 않고 아들 삼형제 를 두었는데 장자 시원(時元)은 무후이고, 차자는 시형(時 亨),셋째는양희(良熙)인데가선대부에가자되었다. 뱚▲함창공파(咸昌公派) 함창공은 국당공의 차자이다. 휘는 인정(仁挺)으로 성균진 사이다. 세종조에 사헌부 감찰, 사재감 주부, 통훈대부 행 함 창(현 상주) 현감을 역임하여 함창공이라 한다. 아들 형보(亨 堡)·형원(亨元)이다. 장자 형보(亨堡)는 성균 생원으로 성종 조에 승의랑 홍주교수, 조봉대부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 했다.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광기(光琦)는 부사과 겸 선무랑이고, 차자 광심(光琛)은 통훈대부 행 연천교수, 셋째 광림(光琳)은정주교수판관,넷째광선(光瑄)은중종조에충 순위부위이다. 성품이 강개하고 지모와 절개가 있으며 남쪽 무주에 옮겨 살았으며 벼슬에는 뜻이 없고 산수와 더불어 살 았다.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다섯째 광린(光璘)은 통훈대부경주교수이다. 연천공 광심(光琛)의 손자 응창(應昌)의 호는 죽와(竹窩) 인데별천으로발탁되어호방(虎榜)에올라통훈대부행양산 군수겸울산진영병마첨절제도위이다.임진왜란에충성을다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막았으며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2 등훈에 책록 되었으며 사실이 옥천읍지에 전해진다. 응남(應 男)은 죽와공의 동생으로 호는 운곡(雲谷)이며 관(官)은 장 사랑수위부위이다.성품이어질고후덕하며효성이지극하였 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형(죽와공)이 중직에 있어 어가를 모 시고 의주까지 가서 공이 혼자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정성 을 다하여 봉양하고 임란을 어렵게 치루었다. 조야에서 임금 께 충성한 형이요 부모에게 효도한 아우라고 모두 칭송하였 다. 함창공의 차자 형원(亨元)은 훈도(訓導)이고, 아들 광우 (光瑀)·광함(光鞫)을 두었는데 장자 광우는 영도(榮道)이 뜻 이 없고 무주 풍서대불산에 들어가 은덕(隱德) 불사(不仕)하 였으며,차자광함의행장을전해지지않는다. ▲참판공파(參判公派) 참판공은 국당공의 셋째아들이다.휘는 인석(仁碩)으로 학 행이 저명(著名)하였다. 관직은 어모장군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였고, 아들 암(巖)이 성종조에 통정대부 함경도 회령 군군 도호부사 절충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영안 남도 병마절도사로 귀하게 됨으로서 추은(推恩)을 받아 병 조참판에 증직되어 참판공이라 한다. 슬하에 암(巖)·잠(岑) ·수(峀)·헌( )인데 장남 휘 암(巖)은 임진년(1472) 별천 무과에 급제하고 1479년 중시(重試)에 등과하여 선전 절충 장군(宣傳 折衝將軍)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영안남도병마절 도사로 재임중 임지에서 순절하였다. 공으로 인해 아버지와 조부에게 증직이 내려졌으며 후예들은 병사공(兵使公, 병마 절도사 줄인말)으로 세계를 잇고 있다. 슬하에 유림(有林)· 유근(有根)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유림은 사헌부 감찰이고 회인·함열 현감을 역임했다. 차남 유근은 찰방공의 아들 평 (坪)의후사를 이었다. 참판공(휘 인석)의 차남 잠(岑)은 봉사이고 아들 순겸(順 謙)은 순릉참봉, 차남 망룡(望龍)은 참봉으로 영동에서 영천 구성으로 이거해갔으며 그의 증손 순명(舜命)의 호는 국남 (菊南)으로 성품이 지효(至孝)하여 13세에 도적이 침입하여 아 버 지 를 해 (害 )하 려 하 자 공 이 일 어 서 말 하 길 비 록 우 리 집 가산을 모두 가져가도 좋으니 우리 아버지만은 살려주시오 하고애걸(哀乞)하니도적이그효심에감동하여그냥돌아갔 다. 또한 친환(親患)을 당함에 단지주혈로 부친을 회생케 하 였으며, 그후 5년 뒤 부친께서 천수를 다하고 졸(卒)함에 여 묘(廬墓) 3년을 하니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에제수되었다. 참판공의 셋째 휘 수(峀)는진위장군 행 충무위부사직을 지 냈으며,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 세걸(世傑)은 통훈대부 삼 수군수 낙안현감, 차남 세호(世豪) 진용교위 훈련원 봉사, 삼 남 세웅(世雄) 고성현감, 사남 세협(世俠)은 조졸하였다. 현 감 공 ( 휘 세 걸 )의 차 남 형 (亨 )의 셋 째 몽 열 (夢 說 ) 의 호 는 황 간 (黃澗)으로 수문장과 통정대부 행 황간현감과 청주진영병마 절제도위를 지냈으며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 련원도정에증직되었다.公은임진왜란에황간현감으로왜적 과싸우다진주성전투에서순절,정려가내려졌다. 참판공의 넷째 헌( ) 학정부사맹(學正副司猛)과 통정대 부에 오르고 내금위장을 지냈다. 슬하에 아들 윤량(允良)은 사직(司直)으로 학행이 뛰어났다. 차남 윤검(允儉)은 충순위 부사직으로 부모에게 효도가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학업에 열중하였다.사직공윤량의아들 사종(嗣宗)의 생부는 유림(有林)이고 호(號) 파청(把淸)으로 효행으로 영릉참봉 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제수 되었다. 이요당은 국당공의 아우이다. 휘는 흥거(興居), 자(字)는 자유(子由) 호는 이요당(二樂堂)으로 우왕12년(1386)에 태 어나 1445년 돌아가시니향년 60세이다.천성이 지고(至考)하 여 부모 섬김이 극진하고 백씨 국당공과 우애 또한 지극하여 형과 함께 상촌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예가 뛰어났다. 아 버지 판윤공의 상을 당하여 애통망극(哀痛罔極)하여 삼년의 시묘를 하루같이 하고 복을 벗음에 군천(郡薦)으로 침랑(寢 郞)이 되고 전중(殿中) 어사(御使)에 이르되 벼슬길에 뜻이 없고 숨어살아 뜻을 굳게하고 호를 이요(二樂)라 하니 즉 인 자(仁者)는 요산(樂山)이요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는 뜻을 취함이라. 청수(淸水) 같은 지조와 독실한 학문이 일세 (一世)의 사표가 되었다.후에 사림(士林)이 화암서원에 제향 (祭享)되었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숙노(淑老)는 세자익위사 사 직으로사직공(侍直公)이라하고,둘째계노(季老)는합천군 수(郡守)로 합천공(陜川公), 셋째 성노(聖老)는 부장(部將) 으로부장공(部將公)으로세계를잇고있다. ▲사직공파(侍直公派) 사직공 휘 숙노(淑老)는 이요당공의 장남으로 자(字)는 겸 주(謙周) 호는 우당(尤堂)으로 태종 8년(1408)에 태어나 좌 군사정과 세자익위사직으로 옥당(玉堂, 홍문관)에 임관(任 官)되어 갑산도호부사이다. 슬하에 원근(元根)·형근(亨根)· 이근(利根)·정근(貞根)·배근(培根)등5형제이다. 장남 원근의 호는 경재(敬齋), 갑산도호부사이다. 아들 양 배(良培)는 부사직(副司直), 양균(良均)은 보공장군 훈련원 주부이다. 손자 응종(應宗)의 號는 만취당(晩翠堂)으로 중종 4년(1509)에 태어나 동래부사, 연안도호부사이고 통정대부 이다. 공이 연안임소에서 은퇴(隱退)하여 시거(始居)한 곳이 송호(松湖)이다. 송호에서 살면서 강편에 솔을 심어 마을 이 름을 송호라하고 만취당을 지어 강학지소를 삼아 자손대대로 전하고지키게하였다.아우응효(應孝)는명주부사이다. 사직공의 차남 형근(亨根)은 무과에 등과하여 통정대부 행 삭주부사와 경주부윤으로 경북구미시의 경주부윤공파로 번 성하였다. 아들은 감(堪)·은(垠)· 경(坰)인데 장자 경은 문과에 급제 하여 봉훈대부 승문원서적에 문자 교 정 관 차 자 은 은 장 사 랑 , 셋 째 경 은진사이다. 삼남 이근의 호는 포정(匏井)이 다. 통정대부 선천·인천부사와 나 주목사를 역임했다. 5대손 윤걸(允 傑)은 생원으로 구국창의호 순절 한공으로한성판윤에증직되었다. 사남 정근은 무과에 등재하여 통 정대부 만포첨사이다. 아들 훈(塤) 은 아버지에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명천부사이다. 중종개옥 (1506년)에 정국원종공신2등이다. 오남배근(培根)은무후이다. ▲합천공파(陜川公派) 합천공은 이요당공의 차남으로 휘는 계노(季老) 호는 유산(裕山) 으로 합천군수를 지냈다. 슬하에 항(恒)·경(經)형제를 두었는데 장 자 항(恒)은 대호군이고, 경(經)은 직장(直長)이고 형조참의에 증직 되었다. ▲부장공파(部將公派) 부사공의 휘는 성노(聖老) 호는 망산(望山), 관직은 부장(部將)이 다. 아들 서문(瑞文)의 호는 은강 (隱崗)으로 무과에 올라 중정대부 충위도총관이다. 손자 원 (沅)은판결사이다.증손양윤(良胤)은훈련원주부이다. 복야공은경남밀양지역의토호세족이었다. 복야공의 장자 문림랑공(휘 직신)은 고려조 관료로 개성에 세거지를두었다.이후후손들은각처로이거해가면서문림랑 공의 장자 창(昌)의 5대손경한의 장자 필문은 경주 서면 화천 차자 필장은 진주, 문림랑공의 차자 정(晶)의 7대손 만생의 후예는 전남 영광, 제주 연동, 김제 부안, 위(緯)의 후손은 경 북 성주 선남, 경(經)의 후손은 경북 의성 금성면, 칠곡, 흠 (欽)의 후손은 거창,경주,기상(琪尙)의 후예는 경북 영천 신 령등에산재해있다. 난계·국당·이요당공의 후예는 충북 영동지역에 세거한다. 영동으로의 이주는 대제학공 휘 시용(時庸) 공께서 밀양에서 태어나 과거를 보려고 송도로 가던 길에 영동읍 냇가 버드나 무아래서휴게(休憩)하였는데그곳은바로전객령김영이의 집 앞이었다.김 공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황룡이 버드나무 아 래서 등천(登天)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김 공은 잠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나가보게 하였던바 영수(英秀)한 젊은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장차 크게 귀한 사람이 될 것을 짐작한 김 공 은 젊은 청년 시용에게 말하기를 귀공(貴公)은 이번 과거에 급제 할 것이다. 바라건대 돌아가는 길에 찾아 주신다면 잊지 않겠다.하시고 한편 공(公,시용)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정혼 (定婚)하였으니 과연 김 공의 예언대로 대과에 급제하여 김 공의 사위가 되면서 세거지를 영동으로 옮겨 크게 번성하였 다. 이후 난계공의 후예는 난계공의 삼남 한림공(휘 계우)이 사육신과 함께 순절함에 화를 피해 영동을 떠나 장남 참판공 의장자양(壤)은경남하동과남해,차자곤(坤)은전남곡성, 삼남 해(垓)는 영동 황간 상촌에 남았고,이후 김천 아포 등지 에이거했다. 난계공의 차남 군수공 중우(仲愚)의 후예는 충남 당진, 경 남 창원 이서, 함안 군북, 셋째 한림공의 장자 운(芸)의 장자 항(恒)은 충남 당진, 거창 차자 신(愼)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한림공의 차자 중양(重陽)은 전남 보성 벌교,승주 낙 안, 광주, 김천 등이고, 셋째 진사공(휘 조)은 광주광역시, 넷 째붕(鵬)은광주,남원,정읍등이다. 국당공의 후예는 영동지역 최대 토반으로 자리했다. 이후 장남 찰방공 후예는 김천,보은,옥천으로 함창공 후예는 주로 영동 심천을 중심으로 황간, 대구, 대전 등 셋째 참판공의 후 예또한영동심천과약목,청주등이다. 이요당공의 후예는 장자 사직공(휘 숙노)은 구미, 영동, 김 천 남면, 사직공의 차자 형근의 후예는 김천, 합천공(季老)의 후예는 김천 남면 운곡,셋째 부장공은 김천 감문 등에 세거한 다. 복야공파는 밀성대군 후예 12중조의 한분으로 크게 번성하 였다.이후 문림랑공,난계공,국당공,이요당공의 4개 파로 분 파되었으나 충북 영동세무서 앞에 회관을 마련하여 화목(和 睦)을이루고있다. 특히 매년 10월 1일 세덕사에서 봉행되는 복야공 이하 선조 향사에 전국의 후손들이 참례하여 추원보본의 정성을 다하고 있으며 영동지역 토소세족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으나 지면 관계상 복야공파의 약사에 미흡한 부분은 다음 기회의 몫으로남겨둔다.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6면에서이어짐 충북영동군심천면고당리전경 국당공파(菊堂公派) 모선재-국당공재사(齋舍):충북영동군심천면(세덕사경내) 이요당공파(二樂堂公派) 인지재-이요당공재사(齋舍):충북영동군심천면약목리 집성촌 맺은말 복야공파종친회관,영동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