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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남원면 1월 10일: 2중대 군토벌대가 김재춘(35, 남)을 비롯한 4명을 의귀국민학 교 동녘밭에서 학살함 1월 12일: 이날 새벽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2중대 군인들이 고 경평(49, 여)을 비롯한 의귀주민 21명과 수망주민 11명을 의귀 국교 동녘밭에서 학살함 (위와 같음) 1월 22일: 고상홍(71, 남)을 비롯한 13명이 남원지서 앞밭에서 학살됨 (남 원리-학살터-남원지서 앞밭, 참조) 1948년 11월 7일, 마을이 초토화되자 일부 주민들은 연고자를 찾아 해안마을 로 소개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민들은 소개하지 않고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움 막을 짓거나 주변의 숲과 궤를 임시 피난처로 삼아 피신생활을 했다. 이런 과정에 서 많은 주민들이 토벌대에 쫓기다 학살됐는데 김홍석(2004년 67세, 남)은, “우 리 가족들 전부 냇가 궤에 숨어있는데 토벌대가 들이닥쳤지. 열한 살이던 나는 아 버지와 도망갈 수 있었지만 만삭인 어머니와 여덟 살 여동생, 여섯 살 남동생 그 리고 네 살 난 여동생은 잡혔어. 군인들이 가족들을 끌고 갔지, 그러다 위에 동생 둘이 쫓아가지 못하니까 그 눈 위에서 동생들에게 총을 쏘았어.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우리 어머님과 막내 동생은 그 후 군부대로 끌려가 총살됐지” 눈시울을 붉히며, 당시를 기억했다. 날이 갈수록 토벌은 강화됐다. 주민들은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피신했다. 1949 년 봄이 되자 토벌대는 귀순공작을 벌였다. 이때 귀순한 주민들 중에는 석방된 사 람도 있었지만 타 지방 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 후 학살된 주민도 많았다. 한편, 소개해 해안마을로 내려갔던 주민들에게도 학살은 이어졌다. 12월 11일, 신흥리에 소개했던 의귀리 주민 오방홍(59, 남)·김갑성(62, 여) 부부가 학살됐다. 가족 중에 도피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48년 12월 하순, 2연대 1대대 2중대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했다. 이들 군토 벌대는 인근 지역을 수색하다 붙잡은 주민들을 학교에 수용했다 걸핏하면 이들을 끌어내 총살했다. 그러던 1949년 1월 12일 무장대가 의귀국교를 습격했다. 이날 의 습격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군인들은 4명이 전사한데 비해 무장대가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군토벌대는 전후 사정을 가리지도 않고 보복학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