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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4·3 초기, 의귀리는 평온했다. 몇몇 청년들이 5·10선거를 거부해 산으로 피신 했지만 군경이 투표소를 지켜서인지 별 충돌 없이 선거를 마쳤다. 의귀리 마을지 는 1948년 5·10선거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5·10 선거 때는 국방경비대 9연대 3중대 1소대가 의귀리·수망리·한남리에 각각 1 분대씩 배치되어 투표함을 지켰다. 의귀리는 의귀국민학교에서 국방경비대 군인 12명 과 남원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런 데 몇몇 의귀리 주민들이 선거에 불참하자, 경찰측에서 그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고, 그들은 도피생활을 하였다.” 이즈음, 좌익활동을 하던 김계원의 부친 김병희(69, 남)가 6월 3일 경찰에 끌려 가 처음으로 총살당했다. 그 후 가끔 토벌대가 마을을 기습하기도 했지만 마을 가 운데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빗개를 세워 경찰과 토벌대 병력의 이동을 감시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희생은 없었다. 그러던 1948년 11월, 중산간 마을에 초토화작 전이라는 광풍이 몰아치며 의귀리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1948년 11월 7일,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친 토벌대의 무조건 방화와 학살로 시작된 의귀리 주민들의 시련은 그 후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음은 의귀리의 주요 주민학살사건이다. 1948년 11월 7일: 군토벌대가 마을을 초토화하자 고광호(78, 남)·김광일(72, 여)· 고영평(43, 남) 일가족 3명이 자신의 집을 지키려다 학살됨 11월 18일: 김인아(24, 여)와 김일두(27, 남), 김일서(16, 여) 3명이 의귀리 높은모루에서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돼 총살됨 1949년 1월 9일: 2연대 1대대 2중대 군인들이 김윤생(51, 남)을 의귀국민학교 동쪽밭에서 학살함. 이곳 학살은 1월 12일까지 이어져 80여 명 이 학살됐다고 주민들은 증언하나 현재 38명만이 확인됨 (아래 학살터-의귀국민학교 동녘밭, 참조) 1) 의귀리, 『말과 귤의 고장 의귀』, 2016, 1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