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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 남원면 1949년 봄,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소개지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에 돌아와 마을 을 재건했다. 그러나 중산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10가호 미만의 작은 자연마 을 주민들은 자신의 마을이 성 밖에 위치하게 돼 당시 쌓은 성 안으로 들어와 생 활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무장대의 습격이 이어지자 다시 해안마을로 두 번째 소개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 후 1950년 1월, 주민들은 재차 마을로 돌아가 축성을 하고 마을을 복구했다. 그러나 성 안이 협소해 곧 북 쪽으로 확장했다. 70여 가호의 주민들이 입주했고, 경찰파견소가 설치됐다. 주민 들은 남문과 북문, 동문, 서문 등지에 설치된 9개 초소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교대로 보초근무를 섰다. 그 후 물도왓이나 선돌선밧, 던덕모루, 넙지리굴 같은 10여 호 내외의 작은 자연마을은 주민들이 돌아가지 않아 지금도 잃어버린 마을 로 남아 있다. 한편 고수동 주민들은 토산리나 토산리의 성 안으로 소개돼 토산주민들과 같이 생활하다 1962년에 마을을 재건해 거주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4·3 시기 주요 주민학살사건이다. 1948년 6월 2일: 오병희(27, 남)와 정창림(32, 남)이 토벌대에 총살됨 (첫 학살 사건) 12월 18~21일: 토벌대가 이 3일간 홀치기사건을 일으켜 신흥주민 70여 명을 위 미리 해안가나 남원지서 앞밭, 정방폭포 등지로 끌고가 학살함 (12월 18일) 토벌대가 신흥리 방구동 큰밭에서 양두선(19)과 김철홍(18, 남)을 학살하고 집결했던 주민 40여 명을 지서로 끌 고가면서 홀치기사건이 시작됨 (2월 21일) 남원지서 경찰은 홀치기사건으로 붙잡아온 김문유 (21, 남)를 비롯한 32명을 정방폭포와 남원지서 앞밭, 위미리 해안가에서 학살함 (서귀리-학살터-정방폭포와 소남머리 일대 / 남원리-학살터-남원지서 앞밭, 참조) 1949년 1월 6일: 보초를 서던 김상창(25, 남)을 비롯한 5명이 마을을 습격한 무 장대와 교전 중 피살됨 1월 26일: 김병출(34, 여)과 오원정(52), 김유완(68)·현유생(여, 66)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