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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토벌대는 마을 구장(區長, 현재의 리장)들에게 주민 성향을 캐물어 학살의 근거로 삼 기도 했다. 그런데 남원면 신흥리 김성홍 구장은 구학문을 한 유식한 분이었지만, 자신 의 답변이 애꿎은 희생으로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무조건 ‘모른다’로 일관하며 공문 조차 처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붙여진 ‘몰라 구장’이라는 그의 명예로운 별명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신흥리는 4·3 초기 비교적 평온했다. 신흥리의 중산간 지역 마을들은 다른 지역 마을이 소개할 시기인 1948년 11월 중순 즈음에도 소개령 없이 무사히 넘어갔 다. 그러던 12월 14일, 신흥리 중산간 지역 마을에 때 늦은 소개령이 내려졌다. 주민들은 각자 연고자를 찾아 해안마을인 방구동과 보말개로 소개했고, 이웃 마 을인 태흥리나 토산리로 옮겨가기도 했다. 마을 주변에 남아 은거생활을 하는 사 람들도 있었다. 1948년 12월 18일, 신흥주민들에게 피바람이 불었다. 토벌대가 일명 홀치기사 건을 일으켜 많은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4·3은 말한다』 1 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래 역사현장-큰밭, 참조) “소개한지 불과 사나흘 지났을 때인 12월 18일, 신흥1구에 들이닥친 토벌대가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주민들 대부분이 모이자 토벌대는 약 40여명을 호명했다. 불려 나온 청장년들은 일단 남원지서에 수감됐다. 이튿날에는 약 30여명의 주민이 스스로 남원지서를 찾아 ‘자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앞서 호명돼 간 사람들과 함께 곧 처형됐 다. 이처럼 신흥리에 가장 큰 인명피해를 몰고 온 ‘토벌전’은 마을에 있던 주민들을 끌 고 가 집단총살한 것이다. 신흥리에서는 불과 며칠 사이에 70명 가량이 희생된 이 사건을 ‘홀치기 사건’이라고 부른다. 바늘이 여러개 매달린 낚싯줄을 고기가 지날 만한 곳에 드리웠다가 확 잡아채 면 낚시바늘이 여기저기에 꽂힌 고기들이 올라온다. 이런 원시적 낚시법을 ‘홀치기 낚 시’라고 하는데 갑작스런 집단희생을 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1)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1998, 109~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