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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 구좌면 까지도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 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와 귀에 피가 나 있는 시신도 있었다” 하고, 당 시 상황을 전했다. 『제민일보』(1992. 4. 4.)에 의하면, 종달리 출신으로 당시 민보 단 간부를 역임했던 고 오지봉은 생전에, “그날 작전은 함덕에 주둔했던 대대본부 가 지휘한 군·경·민 합동작전이었다. 다랑쉬굴을 발견, 군경은 처음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에다 불을 지펴 질식사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같은 자료에서 채정옥은 희생자들이 왜 그 굴속에 있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종달리는 47년 6·6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그 후 4·3사건이 나자 더욱 군경과 서청의 주목을 받아 일부 젊은이들이 일찍부터 산으 로 피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굴 안에 총기류는 없었고 희생자들은 무장대도 아니 었다고 증언했다. 그 후 피해자 유족들은 민보단원들로부터 가족들의 학살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러나 그때만 해도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족들은 결국 세월 이 흐르다보니 굴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일부 유족들은 음력 11월 18 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전날인 음력 11월 17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 했다. 한편, 이곳 다랑쉬굴은 구좌읍 세화리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 연구자 들에 의해 1991년 12월 발견됐다. 그러나 당시 엄중한 사회현실을 감안해 공개 하지 않고 있다가 전문연구자들과 언론사, 의사, 법률가의 자문을 얻어 합동조사 하고 1992년 4월 1일 그 결과를 발표했다. 그 후 학살 당시 현장에서 유해를 수 습했던 종달리 채정옥이 희생자의 신원을 밝히기도 해 사회적 파장은 더욱 커졌 다. 그는 당시 유해를 수습하고 명단을 작성해 따로 보관하고 있었고, 세상이 좋 아지면 다랑쉬굴의 실체를 세상에 알릴 생각이었다고 아프게 술회했다. 그가 밝 힌 희생자는 강태용(34세, 남), 박봉관(27세, 남), 고순환(27세, 남), 고순경(25세, 남), 고태원(25세, 남), 고두만(21세, 남), 함명립(21세, 남), 김진생(52세, 여), 부 성만(21세, 여), 이성란(19세, 여), 이재수(9세, 남) 11명이었다. 채정옥은 그 동안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다 2020년 운명했다. 그 후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45일 만인 5월 15일 한줌의 재로 변해 김녕 앞바 다에 뿌려졌다. 이날 새벽 다랑쉬굴 현장에서는 구좌읍 관계자들과 유족이 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