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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처음 습격은 아침식사가 끝나서 동작이 빠른 사람은 밭에 가고, 좀 뭣한 사람은 막 나가던 그런 시간, 보리 갈 때예요. 밭으로 가던 사람이 더 많았던 그런 시간이었죠. 그 래서 인명피해가 많지 않았나 생각해요. (산에서) 습격은 많이 왔어요. 여자 어린애까 지 왔죠. 불붙이는 사람, 공격하는 사람, 서로 역할을 나눠서 온 것 같이 보였어요. 습격 을 올 때는 경찰들도 속수무책이에요. 처음 습격에서는 지서를 포위하고, 서귀포경찰 서에서 올 것을 가상해서 일주도로에다가 담을 쌓아서 도로 차단하고, 유유히 했어요. 오랜 시간 머물기도 했고요. 집들 거의 전부를 불태운 셈입니다. 바닷가에 몇 집을 제 외하고는 전부 불 태웠어요. 그 집들이 불타는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산사람들이 돌아 갔는데 습격이다! 총소리가 나고, 불타고, 그렇게 되니까 주민들은 전부 바닷가로만 모 였어요. 성급한 사람은 그 추위에 물속으로 들어가고, 궁하니까. 바닷가에 간 사람은 살 아나고. 우리 어머니는 우릴 다 피하게 하고, 불붙은 것을 보면서 의복을 꺼내러 집에 갔다 나오는데 총으로 바로 쏴버렸어요. 어린 아이까지 죽었으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 이 피해를 입었죠. 물건 같은 것은 거의 안 가져가고, 집들 불 지르고 사람 죽이는 것이 그때 주목적인 것 같았어요.” 현봉협(2004년 80세, 남)의 증언이다. 그는 그날 습격의 이유에 대해서도 덧붙 여 이야기했다. “남원의 수망, 한남, 의귀에는 산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어요. 위미는 산에 가담한 사 람이 없었지요. 지서장 김봉주라는 사람이 와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에게는 아주 혹독하게 굴었어요. 산에 가담할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산에서는 반대파 가 많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후의 생활터전은 위미지서가 중심이 되었다.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지서 앞에 모여 살 때는, 바닷가에다가 왜정시대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나 무를 베어다가 두세 개 꽂아놓고 그 위에 새를 조금 덮어서 감방 안에 들어가듯이 한 것이었어요. 배 고팠죠. 추웠죠. ‘위미리 헌 주럭’이라는 말이 그때 나왔어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성 안에는 위미 관내 주민 전부가 와서 살았어요. 지서 앞, 일주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