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page

64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지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3일, 무장대가 세화리를 습격한 이후부터는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이날 밤 무장대는 밤 9시께 마을을 습격했으나 토벌대가 주둔 하고 있는 세회지서는 공격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살해했다. 당시 민보단에 편입돼 보초 서던 사람은 물론 열살 미만의 어린이에서 부터 70세 노파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40여 명의 주민이 무장대에 살해되고, 주 택 50여 채가 전소됐다. 이날 습격은 지서가 있던 세화리를 주 대상으로 삼았지 만 다음날인 12월 4일 새벽까지 지속되며 이웃 평대나 하도, 상도, 종달이 덩달아 기습당했고, 세화국민학교와 하도국민학교도 전소됐다. 이날 무장대 기습의 여파 는 엄청났다. 토벌대는 곧 보복에 들어가 지서 수감자나 도피자 가족, 입산자 가 족은 물론 많은 지역 주민들을 이유 없이 죽음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현재 해녀항일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세화리와 상도리의 경계지점 연두망 일대 는 세화지서에 수감됐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총살당했던 학살터이다. 세화 주민 부두호(03년 70세, 남)가, “육지에서 내려온 군인들이영 순경들이 4·3사건에 관 련됐거나 한 사람들과 그 가족을 여기서 많이 죽였다. 한두 번이 아니다. 수상하 다고,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끌고 와서. 그자 뭐, 파리새끼 하나 죽이는 정도였다. 해녀기념탑 일대가 모두 학살터였다” 증언했다. 이어 그는 세화는 물론 인근 마을 주민들도 군부대가 있는 성산포에 끌려가 많이 희생됐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서 아버지를 잃은 김양선(03년 66세, 남)이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송당 에서 세화리에 소개 내려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군인들이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아버지를 데려가더니 다음 날 모래동산에서 죽였다. 그때 송 당에서 피난갔던 주민 4명 정도가 같이 희생된 걸로 알고 있다.” 한편 1992년 4월 1일, 1948년 12월 18일 다랑쉬굴에 피신했다 세화리 민관합 동 토벌대에 학살된 하도·종달 주민 11명의 유해가 발굴돼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 도 했다. 세화리의 주요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8년 12월 3일: 무장대의 세화리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고순창(67, 남) 등 45명이 학살됨. 그중 세화 주민은 34명(사망 31명, 부상 3명) 이고, 김녕 4명과 송당 7명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