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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제주 해녀들의 권리를 부르짖은 “부덕량” 63 운동의 하나로 꼽힌다.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 3대 항일운동으로 꼽혀 부덕량 애국지사(1911.11.5~1939.10.4)는 당시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현 제주특별자 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아버지 부계준(夫 啓俊)과 어머니 임행신(林行信)의 큰딸로 태어났다. 제주의 소녀들이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물질을 배워 생계를 도왔듯이 부덕량 지사도 13살부터 해녀의 길 로 들어섰다. 육체적인 고달픔 속에서도 해녀들은 하루 종일 물질로 지친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밤에 는 하도보통학교 부설 야학강습소에서 한글을 떼고 『농민독본』, 『노동독본』 등으로 신교육을 받으면서 일제의 침탈에 대한 새로운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부덕량 지사 나이 스무 살 때인 1931년 12월 20 일,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해녀들의 노동력을 착취 하고 조합비를 무리하게 징수하자, 해녀들은 “지정 판매 폐지, 경쟁입찰에 의한 공동판매제 부활, 미성 년자와 40세 이상의 해녀조합비 면제” 등을 요구하 는 이른바 ‘해녀들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러나 이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부덕량 지사 와 동료 해녀들은 더욱더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32년 1월 7일, 김옥련·부춘화 등과 함께 해녀 300여 명을 모아 세화리 5일장에서 시위를 벌였 다. 12일에는 해녀 1천여 명이 세화주재소의 저지 를 뚫고 호미와 빗창을 들고 시위를 확산했다. 이에 앞서 제주해녀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부녀 회장 부춘화 지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 언했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강제적 침탈 행위의 중단을 수차 건의하였으나, 시정되지 않자 구좌면 해녀 회 원들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며 직접 진정서(9개 항의 요구사항)를 작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 였다. 1932년 1월 7일 제주도사가 제주도 내 순시차 구좌면 세화리를 경유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해녀회장인 나는 동료 김옥련, 부덕량에게 조직적으 로 연락하여 구좌면 세화리를 중심으로 한 이웃 자 연부락별로 조직된 해녀 1천여 명을 소집시켜 해녀 복과 해녀작업 차림으로 무장케 하여 때마침 세화리 시장(경찰 주재소 부근)을 지나가는 제주도(지)사 겸 해녀조합장인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의 행차를 가 로막고 해녀의 권익옹호와 주권회복을 요구하며 해 녀노래를 합창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했는데, 이때 제주도사는 혼비백산하여 피신 도주하게 되었다” 제주 도청에 사무실을 둔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은 그 확장과 관리를 위하여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외부에 출어하는 조합원을 감독하고 보호한다 는 구실로 부산·목포·여수 등지에 출장소를 설치하기 낮에는 물질, 밤에는 야학으로 민족의식을 키워갔던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동그라미안이 부덕량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