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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5년 6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6월의 독립운동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비밀리 에 서대문의 피어선성경학원에 모여 격문을 인쇄했 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경찰에 의해 탐지되었다. 경찰은 6월 16일 오후 2시경 피어선성경학원 기숙 사를 습격하여 관련 학생 3명을 검거하고 등사판 2 대와 유인물 2천여 장을 압수했다. 이어서 배재고보 문창모, 협성학교 손병석 등 모두 14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사건을 가급적 축소시키는 방향 으로 6·10만세 이후의 사태를 수습한다는 방침 아래 이들에게 모두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석방했다. 한편 지방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전북 고창공 립보통학교 6학년생 50여 명은 요배식(遙拜式)을 마 치고 돌아가는 길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학교 는 이들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밖에도 수많은 학교에서 순종 서거 이후 망곡과 봉도식이 행해졌 고, 이를 가로막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에게 동맹 휴학으로 맞서는 등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6·10만세운동 수습과 재판 6월 10일 서울에서의 시위와 관련하여 조선총독 부는 당초 만세를 외친 5백 명 내지 6백 명을 모두 구속할 방침이었으나, 방침을 변경하여 시위를 주동 한 학생들 외에는 모두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가급적 6·10만세사건을 축소하여 그 파장을 줄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73명을 구속 했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그 가운데 11명만 기 소하고 나머지 6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물론 경찰은 이들 외에도 고려공산청년회의 권오 설과 박내원 등에 대해서는 따로 수사를 진행하였 고, 수사를 진행하던 중에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후 강달영을 비롯 한 관련 인물들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6·10 만세운동과 관련된 권오설, 박내원, 권오상(일명 권 오돈, 연희전문), 한일청(연희전문), 민창식(천도교 인쇄직공동맹) 등은 ‘6월사건’으로 분류하여 따로 기 소하였다. 기소된 이들에 대한 재판은 11월 2일부터 시작되 었다. 1심 판결은 11월 17일에 있었으며, 학생 11명 6·10만세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 기사 동아일보(1926.6.11)에 보도된 순종 인산일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