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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5년 6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6월의 독립운동 어서 격문이 천도교당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 추정하 고 6일 천도교 본당을 급습하여 본당 구내에서 격문 을 발견하고 모두 압수했다. 또 경찰은 수사 과정에 서 권오설의 은신처를 알아내 7일 권오설을 검거했 다. 같은 날 상해에서 온 격문도 경성역에서 발견되 어 압수되었다. 경찰은 서울과 지방의 사회단체 사 무실과 간부들의 집을 일제히 수색하여 격문이 이미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했지만, 격문은 아직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병립은 5월 3일 권 오설로부터 순종 인산일에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 고 협조를 부탁받았다. 학생과학연구회에 주어진 임 무는 순종 인산일 당일에 길 위에서 ‘조선독립만세’ 를 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것이었다. 이병립(연 희전문), 이선호(중앙고보), 박두종(청년회관), 박하 균(연희전문), 유면희(중앙고보) 등 학생과학연구회 간부진은 권오설과는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로 했다. 이들은 명함인쇄기를 빌려 격문 1만 매를 인쇄하였다. 6월 7일 권오설은 체포되었지만 학생과 학연구회 측의 준비는 드러나지 않아, 인쇄된 격문 은 9일 중앙고보, 중동학교 등의 학생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한편 또 다른 학생 그룹인 박용규(중앙고보), 이동 환(중앙고보), 김재문(중동학교), 황정환(중동학교) 등은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통동(通 洞)에 있던 박용규의 하숙집에서 5월 말까지 격문 5 천 매를 인쇄했다. 이들은 6월 8일과 9일 시내 각 학 교 우편함에 격문을 넣었으며, 지방의 주요 학교에 도 격문을 우편으로 발송했다. 같은 중앙고보에 다 니던 이선호와 박용규, 이동환 등은 서로의 계획을 알고, 각자 만세운동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6·10만세운동의 전개과정 6월 10일 순종 인산일을 앞두고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시위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 에 동원된 일본 군대는 모두 1만여 명에 달했다. 또 각 지방에서 차출된 경찰도 3천5백 명에 이르렀다. 용산의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는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던 종로3가 파고다공원에 아예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상당한 숫자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로써 서울 시내는 사실상 계엄상태가 되었다. 6월 10일 인산 행렬은 오전 8시에 창덕궁 돈화문 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분에 봉결식장(奉訣式場)인 을지로 4가 옛 훈련원터에 도착하고, 오전 11시 봉 결식과 노제(路祭)를 지내고, 오후 1시에 식장을 출 발하여, 동대문과 청량리를 거쳐 장지인 금곡 유릉 에 도착하도록 예정되었다. 조선총독부측은 장례행렬이 지나갈 도로 양측에 약 2만 1천 명의 중등 이상 각급 학교 학생들을 동원 하여 늘어서게 하였다. 이에 따라 돈화문에서 을지 로4가 사거리까지 도로의 양쪽으로 공사립 고등보 통학교생과 전문학교생, 대학생 등 1만 4천 명, 을지 로 4가 남북 도로변에 실업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7 천여 명 학생들이 도열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앞뒤 로는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이 포위하여 삼엄한 경계와 감시망을 구축했다. 오전 8시 30분경 인산 행렬이 종로4가 단성사 앞 을 통과하자 맞은 편 동양루(옛 피카디리 극장 자리) 앞에 도열한 중앙고보 학생들 가운데 이선호가 앞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