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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4월30일 수요일 6 (제220호) 관향조 종친회 1666년 인재(認齋) 민시중(閔蓍重,1625 ~1677)이 남양에 부임하여 도원재 박세희 선생의 유풍(遺風)을 상상(想像)하고 유 생들의 공송(公誦,공론을 쫓아 사람을 천 거함)을 수탐(搜探)하여 사실을 찾아내 우암(尤庵)선생에게 가서 의논하여 창건 된경기화성의 안곡서원시향이지난 2일 (음3.5)오전11시 지역기관단체장과 유림, 서신중학교 학생,후손 등 100여명이 참례 한 가운데 화성특례시문화원 주관으로 엄 숙봉행되었다. 이날 향사는 안곡서원지 발간 기념식에 이어박동열집례관의창홀에따라화성특 례시의회 배정수 의장, 유지선 문화원장, 신광호 서신면장이 각각 헌작하고 남양홍 씨 홍영선 화수회장이 축관으로 독축하였 다. 화성시 향토유적 1호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안곡서원은 도원재 박세희, 송촌 박 세훈, 인재 홍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지방교육의일익을담당해왔다. 박세희(世熹)선생의號는도원재(道源 齋), 1510년(庚午)에 진사시 1등 5인에 합 격하고 1514년(甲戌)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으로 호당(湖堂)에 뽑혔고, 승정원좌승지 재임 중 기묘사화 (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 배되었다가유배지에서생을마쳤다. 인조때복권되고가선대부사헌부대사 헌 겸 동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에증직되었다. 현종 무신년(1668)에 청원건의에 의하 여기묘명현으로학문명절이특별한10인 에들어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춘추 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 학,오위도총부도총관 좌빈객으로 추증되 고 시호 문강(文剛)이 내려졌다. 운곡공, 남포공과함께전남순천의이천사에배향 되었다. 박세훈 선생은 도원재공의 백형 (伯兄)으로 자는 훈지(勳之)이고 호는 松村(송촌)이다. 학문이 뛰어 났다. 1504년(연산군10년) 17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부친 묘 아래에 초 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는데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시니 고을 사람 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을 하였다. 상중 도원재공과 인재공을 손수 가르치시어 후일 장원급제를 하도록 하시 였다.중묘조(中廟朝)에어진사람들이배 출되었을 때 공은 재능이 많고 학문과 덕 행이 있는 것으로 별과(別科)에 천거되었 다.그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임명 하는명을내려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에 이르렀으나 사은숙배(謝恩肅拜) 하였 을 뿐이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소나무 와대나무를심어서세한(歲寒)의깊은취 미를 붙이고 따라서 송촌(松村)이라 스스 로 이름 붙였다. 1553년(명종8년) 향연 66 세로돌아가셨다.후일이조참의에증직되 었다. 인재(忍齋) 홍섬(洪 暹)의 본관은 남양 (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이다. 조광조(趙光祖)에게 수학했다. 1528년 사 마시에,1531년식년문과에급제했다.1571 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어 영의정을 3회 중임했다.1579년병으로사임하고영중추 부사로 전임했다. 븮주역븯·븮서경븯에 밝았고 정이(程 視 )의 븮사잠(四箴)븯을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저서로 븮인재 집븯·븮인재잡록븯이있다.시호는경헌(景憲) 이다. 한편 이날 향사 전 가진 기념식에서 김 남일 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창건 359주년 을 맞는 동안 안곡서원은 지역 유생들이 학문을 닦는 전당이 되었고, 전통문화의 요람(搖籃)으로 오늘 학생들이 대거 참례 한 것은 우리 서원을 지켜나갈 소중한 자 원이이기에 더욱 반갑다며 서원지 탐독을 권유했다. 註원상[院相]조선시대,국왕이 병중으로 직무 를보지못하거나어린왕이 즉위하여섭정을행할 때,원로급재상들이 승정원에주재하여국정전반 에대하여정책결정에자문으로 참여하도록한 임 시관직 경기화성안곡서원시향봉행 도원재 박세희, 송촌 박세훈, 인재 홍섬 선생 유덕 기려 안곡서원은지난 2일박동열집례관의집전으로 추모제향을올리고있다. 안곡서원지를 배향된 선현에게 봉정(奉呈)하고 이날 배포에들어갔다. 인근의서신중학교 학생이 전통문화현장체험을하기위해안곡서원을찾았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선무원종 3등공신에 책록된 운곡공 박문부 선생의 제향이 지난 20일 봉행되 었다.(사진제관 앞줄부터박동기,박창영,박동성,박동술,박만수) 밀성박씨 전객령공(휘 天卿)후 운곡공 박문부 선생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춘향이 지난 20일 일요일 오전 10시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소재 운천서원 충효사(忠 孝祠)에서 동기(東祺) 집례의 창홀에 따 라동성(東星),동술(東述),만수(萬秀)종 인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헌작하 고창영(昌榮)축관의독축으로엄숙봉행 되었다. 제향후에는 원근의 성손들이 함께하는 화수회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며 시종일 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진 가운데 박동 술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객지를 떠나 항 상 고향을 그리다 오늘 이처럼 즐거운 시 간을 갖게 되어 기쁘다며 선조님 제향에 함께한 종원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운곡공의 휘는 문부(文富)의 字는 극달 (極達) 호는 운곡(雲谷) 또는 삼우당(三 憂堂)으로1563년(癸亥,명종18)에태어났 다. 삼종질 지족당(휘 명부)과 한강 정구 문하에서 사사(師事) 하였고, 1582년(선 조15) 무과로 선전관 제포첨사, 1589년 조 정에들어가사복시첨정이되었다.그러나 철인(哲人, 철학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깊은사람)의 언로가 막히는 것을 보고 분 개(憤慨)하여 기관(棄官, 벼슬을 버리고) 하여 1591년 향리에 돌아와 운천재(雲泉 齋)를 축실하여 매일 무사(武事)를 강론 하면서불안한상황의극복방안,문무인의 마음가짐의 각성을 촉구하다가 1592년 임 진왜란을 당하자 왜병이 한성을 핍박하므 로 임금이 근왕 (勤王)의 명을 내렸을 때 체찰 사 이원익과 초 유사 김성일의 군문을 따라 대 가파천에 시종 일관 힘들고 피 곤함을 나타내 지 않고 묵묵히 호 종 하 였 으 며 환도 후 의병창 의에도 참여하 여 많은 전공을 세워선무원종삼등에녹훈되고이성현감 에 올랐으며, 운곡유집(雲谷遺集)이 있고 운천서원에봉향되었다. 운천서원은 헌종4년(1838년, 戊戌)에 사림의 공의로 운곡공과 공의 5대손 무욕 재(無辱齋,휘상경)공을봉안하여유덕을 추모하기위하여운천서사를현금천면신 지리1187번지에창건하였다. 그러나 고종 5년 조령으로 훼철되고 운 천재와관리사만있었는데이를1922년철 거하고신지리1340번지에운천서사(雲泉 書舍)를 정당을 운천재(雲泉齋), 무욕재 (無辱齋)를정당앞동편에서향으로,관리 사를 정당 앞 서편에 동향으로 이건 중창 하여매년석채례를행하였다. 1995년 운천서사 경내에 사림의 공의로 충효사(忠孝祠)사당을 세워 운곡 박선생 을 봉안 고유하고 매년 음3월 23일 제항하 여오다2009년사림의공의로운천서사를 운천서원(雲泉書院)으로 승호(陞號)하여 지금에 이르고, 현재 제향은 음 3월 23일 전후한일요일에봉행한다. 경북청도운천서원시향및화수회 성료 임진왜란에창의하여선무원종공신3등,이성현감을지낸운곡공의충의정신기려 운천서원전경 노량진 언덕 에 모셔진 사육 신의 충절을 기 리는 제569주기 춘향 제례가 지 난 13일 오전 11 시 사육신 선양 회 주관으로 엄 숙봉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제향전 선양회 설립취지 및 제 례봉행 경과보고, 회장인사, 추모사, 참석 귀빈 및 헌관 소개에 이어 순천박씨 충정 공파 박기형 사무국장의 집례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증손 이준 선생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이어 유학자 하종팔 선생, 창녕 성씨창산군파성찬용종회장이아헌과종 헌을 유동열 선생이 축관으로 독축하면서 4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제향전 소개된 선양회 설립취지와 경과 보고를 보면 1978년 5월에 노량진 사육신 묘가 성역화 되는 과정에서, 당시 막강한 권력을휘두르던김모씨가자기의직조이 며 삼중신의 한 분인 백촌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의반열에끼워넣으려는불순한저 의로, 서둘러 백촌의 가묘를 육신 묘역에 봉축하고,일부몰지각한언론인과사학자 들을 회유 협박 매수 등의 방법으로 사주 하여, 500여 년간 한 결 같이 충절의 표상 으로숭앙되어온사육신의구성과정통성 을 당치 않은 억설과 추론으로 왜곡 호도 케 함으로써, 십 수년래 백촌선생을 주향 으로받드는이른바사칠신제(祭)를거리 낌 없이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곡 학아세가 예사로운 염량세태라 할지라도, 이런 일이 어찌 우리의 수도 서울에서 용 인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작태가 통탄스러울 뿐이다. 라고 소개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은 지난 날 세 종과 문종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구신들 중에 시세 따라 종사하는 아유구용배(阿 諛苟容輩,아첨하며 구차스런 모습) 또한 적지 않았으나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 지·류성원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절의파 학사들과 유응부·성승·박쟁 등 비분강개 의무신들이은밀히회동하여상왕단종의 복위를 꾀하면서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 다. 세조2년병자6월1일,세조는상왕과더 불어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고 명나라에 서 책명사로 나온 윤봉과 김흥 양사를 접 대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성삼문과 박팽년은연회장의일을맡고유응부와성 승·박쟁이별운검을서게될때,세조부자 를 한꺼번에 참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는모의가수립되었다. 그런데 거사직전에 공교롭게도 왕명에 의한 갑작스런 별운검의 폐지와 공모자 김질의 고변으로, 모의 전모가 들어남으 로써 상왕 복위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주모급연루자들은모두검거 되어혹독한고문을당하다가혹은옥사하 거나능지처참의참형에처해지고,직계존 비속까지 연좌 처형됨으로써 사실상 멸문 지화를 면치 못하였다. 또한 여파는 상왕 단종에게도 미쳐 일조에 노산군(魯山君) 으로 강봉 되어 이듬해 멀리 영월로 강제 유배된지 3개월 만에 살해되는 비운을 당 하였다. 세조실록에는 주모 급 17인,연루자 100 여명,희생자10,000여명에이른다고적혀 있으니,그야말로공전 절후의대참사이기 도하려니와,이끔찍한사건을가리켜‘병 자사화(丙子士禍)’ 또는 ‘사육신의거사건 (死六臣義擧事件)’이라고도부른다. 이 무렵 거사 모의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세조와 그 일당들의 흉악한 패 륜 행위에 분개하여 세상을 등지고 마친 체하거나산야에피하여은거한사류들이 적지않았다. 특히그중에서도매월당김시습을위시 한 추강 남효온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 수 등이 그 대표적인 인사들인바, 이들을 가리켜 사육신의 대칭인 생육신(生六臣) 이라고부르는것이다. 이가운데추강남효온은후일병자사화 의 전말을 소상하게 밝힌 ‘병자육신록(丙 子六臣錄)’을 찬술하였는데, 이‘육신전 (六臣傳)’은당시의사실을올바르게평하 고 서술한 유일본이라 할 수 있으며,어용 사가들이 멋대로 써놓은 ‘왕조실록(王朝 實錄)’은 준신(準信,기준에맞춰믿음)하 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 제향전 박성규선양회장은 인사말 을 통해 사육신의 야기는 우리에게 충신 들의정신과오늘날우리의삶을되돌아보 는 역사의 장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우리 현실을 돌이켜 보면서 선조님들께 평안히 영면 할 수 있도록 우리의 힘을 길러 왜곡 된 역사를 막아내는데 온 힘을 모으자며 백촌김문기의틈입으로불편한진실을피 력했다. 한편사육신의위해는대구달성군하빈 면묘골의육신사에도모셔져있다. 사육신추모제569주기춘향봉행 사육신선양회븣의절사(義節祠)에서넋기려 4월둘째주일요일인지난 13일노량진사육신공원에서육신의충절을기리는춘향이 봉행되었다. 고종황제증손자인이준선생이 초헌관으로 헌 작하고있다. 박성규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있다. 3월 중정일은 맞은 지난 8일 경남 산청 의신계서원강당에는이른아침부터도포 를단정하게입은유림들이찾아와시(詩) 를 읊는 등 담소를 나누고 개좌를 열어 제 관을 분정하는 신계서원의 향사는 지역의 유풍을잘보여주는듯하다. 정충사에배향된송은박익선생과아드 님인 아당(휘 조), 졸당(휘 총) 선생의 행 장을 원임 정태근 선생의 소개에 이어 정 충사로 옮겨 유학자 신갑열(申甲烈) 선생 의 집례로 하열희(河烈熙), 김재호(金在 浩), 권영범(權永範) 선생 순으로 헌작하 고오희세(吳熙世)선생이축관을맡아독 축했다. 신계서원(新溪書院)은 경남 산청군 신 안면 진태마을 뒷산 자락에 있다. 1836년 (丙申 헌종2)에 시공(始工)하여 1869년 (己亥)에工役)을마쳤다. 헌종 5년(1839) 신계서원 정충사(貞忠 祠)에 송은 박익선생을 주벽으로 영정(影 幀)을 봉안하고 아당(啞堂), 졸당(拙堂) 두 분의 아드님을 배향하여 춘(春)3월 추 (秋) 9월 중정(中丁)에 유림에서 봉향(奉 享)하였다. 1868년(고종5 무진(戊辰))에 조정의 서 원철폐령으로인하여훼철되어응봉산중 턱 현 위치에 영정각(影幀閣) 3칸과 세한 재(歲寒齋)를 건립하여 송은선생의 영정 을 봉안하고 후손들이 춘추로 향화(香火) 를 받들었으며 학당(學堂)으로 이어졌다. 1985년(乙丑) 3월 채례시(菜禮時)에 유림 들이 신계서원을 복원하자는 공의(公儀) 가 있은 뒤 후손들이 그 일을 맡았고, 유림 들이 도와 經營하니 사우3칸과 내삼문 그 리고 대문3칸을 중건하고 주위를 정화했 으며 제기 18점이 지방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지자체에서 문화재 보호각(東 齋) 3칸을 중건하였으며 원우(院宇)를 번 와( 붕瓦)하고 보수하고, 1989년 3월 11일 복설하였다. 충숙공 송은 박선생(忠肅公松隱朴先 生)의 휘는 익(翊 : 1332~1398)이며 자는 태시(太始),호는 송은(松隱)이다.공민조 에 급제하여 사재소감, 예부시랑, 중서령, 예판 등 벼슬을 했다. 이성계와 같이 남정 북벌을 했다. 그러나 려말 국정이 쇠퇴하 고어지러워지자벼슬을버리고밀주송계 에돌아와정 포은,이목은,길야 은등여러선비들과시국을개탄 하고 걱정하면서 문학을 즐기고 토론하였다. 예조정랑아당박선생(禮曺正 郞啞堂朴先生)은 송은선생의 셋 째로서휘는조(調)자는신옹(愼 翁)호는 아당(啞堂)이다. 3형제 가 함께 수학하여 진사에 오르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은 예조 정랑이다. 문장에 뛰어나 야은ㆍ 춘정ㆍ독곡 선생 등과 상교하였 으며 중년에 경남의령으로 이거 하여아우졸당공과같이산수간에서만년 을 보냈다. 이조참판 졸당 박선생(吏曹參判拙堂朴 先生)은 송은선생의 넷째로 휘는 총(聰), 자는명옹(瞑翁),호는졸당(拙堂)이다.태 종조에 진사에 오르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호조정랑에 이르렀다. 줄 후 이조 참판에증직되었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경남산청신계서원춘향봉행 신계서원이 제향을앞두고개좌를열어제관을분정후집사분정기를회람하고있다. 중정일을맞은지난 8일제향에서독축하고있다. 지역유림주관븣고려충신송은박익선생과두아들아당·졸당3부자학덕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