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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 조천면 전쟁이 발발하면서 혼자 타지방으로 나가버렸다. 대흘국민학교에 성을 쌓아 집단생활을 하던 와흘리와 대흘2구, 와산리 주민들 은 1952년 고향 마을을 재건하는 것이 허가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대흘 국민학교는 1957년 조천국민학교 대흘분교장으로 재건립되었다가 1962년 대흘 국민학교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 현황 당시 학교터에 현대식 건물의 대흘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둘레에 쌓았 던 성담은 원래 용도였던 밭담이나 산담으로 환원됐다. ② 총 맞은 비석 가. 소재지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1209-1번지 나. 개요 조선시대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가는, 요즘의 번영로 중간 쯤인 이곳 대흘리 1209-1번지 주변에는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동원이 있었다. 보통 이곳 동원에는 5가호 정도의 주민들이 살았다. 목사나 현감, 판관 같은 고관들이 쉬어갈 때는 주 민들이 동원돼 이들에게 편의가 도모되기도 했는데, 그 후 이들이 자나간 자리에 는 공덕비가 세워졌다. 이곳에는 그러한 공덕비 4기가 남아 있다. 그것은 1800년 대에 세워진 「使相鄭岐源去思碑」와 「使相白公樂淵恤民善政碑」, 「判官宋公詳淳永 世不忘碑」, 「判官康公仁鎬善政碑」이다. 이 비석들에는 와흘, 선흘, 대흘, 와산의 4 개 마을 주민들이 목사와 판관이 자신의 마을일을 잘 해결해준데 대한 감사의 뜻 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선정비 4기가 4·3 시기 총탄에 맞아 일부가 부서졌다. 당시 선정비 바로 앞에 경찰토벌대가 주둔하는 동원주둔소가 있었던 걸로 보아 이들이 장난삼 아, 혹은 사격연습으로 발포해 좋지 않은 흔적을 남겼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