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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서귀면 2. 동홍리 동홍리는 산남지방 동과 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동쪽은 토평 리, 서쪽은 서홍리와 접해있었다. 1700년대 이후 군위 오씨가 본동인 2통 마을을 중심으로 산지천을 생활용수로 이용하며 집성촌을 이뤄 살았고, 굴왓(굴전동)에 는 통물을 생활용수로 삼아 제주 부씨가 살았다. 4·3 시기 동홍리에는 160여 가호의 주민들이 살았다. 주민들은 당시 서북청년 회의 횡포 때문에 4·3이 더욱 확대됐다고 입을 모았다. 손정대는, “이북청년들이 동네에 와서 사람들 있으면 때리고, 트집을 잡고, 참 말도 못 하게 했어. 무조건 와! 하면 끝나는 거야. 그러니 (우린) 숨고 피하고 할 수밖에. 참 악질들이었어”라 고 증언했다. 1948년 11월 7일, 무장대가 서귀리를 습격한 후 주민 희생은 커져갔다. 12월 에 접어들자 마을엔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했다. 이런 와 중에 산으로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즈음 정방폭포 주변은 학살터로 변 했다.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주변에서는 동홍리를 비롯한 서귀리의 주변마을과 남 원면, 중문면에서까지 주민들이 끌려와 학살됐다. 1949년에 접어들자 서귀국민 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오태병(27, 남)이 체포돼 제주주정공장에서 취조와 고문을 받다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1947년 3·1발포사건 후 3·10총파업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