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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 • 6·10만세운동 59 그런 가운데 순종 인산일을 기하여 3·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 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중국 상해(上海)에 있던 사회주의자인 김단 야와 김찬은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국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세웠는데, 4월 중순 김단야는 중국 안동 (현 단둥)에 파견되었다. 김단야는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신의주에 잠입하여 안동 출신 권오설을 만나 메이데이 시 위를 논의하던 중 순종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이에 김단야는 권오설에게 순종 인산일 만세시위가 메이 데이 시위보다 먼저 필요하다면서 이를 준비할 것을 지시하고, 관련 자금을 제공했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추진 을 위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권오설, 이지탁, 박민영 세 사람으로 구성된 투쟁지도부가 꾸려졌다. 이들은 투쟁방침으로서 ①사회주의, 민족 주의, 종교계, 청년계의 인물을 망라하여 ‘대한독립 당’을 조직할 것, ②대한독립당이 주체가 되어 6월 10일을 기해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③시위 는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도로)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했다가 격문과 전단을 살포하면서 ‘조선독립만 세’를 외칠 것 등을 채택했다. 김단야는 상해로 돌아가 김찬과 함께 “복상 통곡 하는 민중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작성한 뒤, 최창식 이 경영하는 삼일인쇄소에서 5천 매를 인쇄하여 서 울로 보냈다. 인쇄물은 5월 28일경 안동(현 단둥)에 도착했고, 삼성운송점에서 다시 서울로 부쳐졌다. 그러나 이 격 문은 6월 7일 경성역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압수되고 말았다. 한편, 서울의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이자 조선노농총동맹 간부였던 박내원에게 자금을 주어 격문의 인쇄를 부탁했다. 천도교 소속이기도 했던 박내원은 천도교청년동맹과 인쇄직공조합의 사람들 가운데 백명천, 양재식, 이용재 등을 동지로 규합하 였다. 이들은 소형인쇄기와 종이 등을 구입하여 5월 31일까지 약 5만 매의 격문을 인쇄하여 상자에 넣어 천도교당 안에 숨겨두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의 조 선일보 지사, 개벽사 지사,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등 에 격문 발송을 계획했다.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부터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6월 4일 다른 사건과 관련하여 위조지폐범 을 쫓던 경찰은 이동규라는 사람의 집에서 ‘대한독 립당’ 명의의 격문 한 장을 발견했다. 경찰은 이동규 가 격문을 안정식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안정식은 권오설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6·10만세운동 당시 조선공산당이 뿌린 격 고문의 일본어 번역본 끝부분. ‘대한독립 당’ 이름으로 작성됐음을 알 수 있다(이상 임경석 제공). 김단야(본명 김태연, 1900~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