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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 • 대한민국임시정부 59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임시정부의 시기별 활동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청 사를 두고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1932년 윤봉길의 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기까지의 시기를 상하이 시기 로 구분한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통합정부를 이루 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를 통할하며 정부 활동을 전 개했다. 다만 임시정부 지도부에 대한 신임 문제가 불거져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며, 1925년에는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헌법 개정을 통 해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한 임시정부는 미주 동포의 지원을 받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1932년 이봉창 의 사의 도쿄[東京]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虹口]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일제의 압박으로 상하이를 떠나게 된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에 자리를 잡고 전열을 정비했다. 윤봉 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 요인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 의 포위망을 피하기 위해 김구 등은 자싱[嘉興], 난 징[南京] 등지를 오가며 피난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 기 임시정부는 송병조, 차리석, 김철 등 국무위원들 을 중심으로 고군분투를 이어가며 전장[鎭江], 창사 [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등지로 이동해야 했다. 상하이에서 충칭에 이르던 8년간의 시기를 이동기, 혹은 장정시기라 한다. 1940년 충칭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는 주축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 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42년 10월 제34회 임시의정 원에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 의자연맹의 독립운동가들이 의원으로 합류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좌우를 아우르는 연립정부, 다당 제 정치체로 발전하였다. 중국 국민정부와의 연대 속에서 국제적 공조망을 다져간 임시정부는 1943년 카이로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이 명문화되는 성과 를 이루어 나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 1919년 수립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최후의 보 루였다. 임시정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 자주와 독립의 꿈을 그려나 갔다. 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를 선포했으며, 헌법과 법률을 통해 이를 제도화했 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민주공화제의 대원칙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으로서의 평등권과 자 유권, 참정권 등이 명시되었다. 1941년 11월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하였다. 임시정부의 사람들이 지향한 나라는 정 치-경제-교육을 통한 균등사회였다. 삼균주의에 입 각한 균등사상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그치지 않 고, 민족대 민족, 국가대 국가간의 균평(均平), 즉 평 화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광복 후 제헌헌법을 거쳐 현행 헌법에도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