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page
591 대정면 까지 근무했다. 구억국민학교는 1948년 4월 28일, 김달삼과 김익렬이 4·28 평화회담을 열었 던 장소로 유명하다. 이 회담에 대해서는 2003년 정부에서 간행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2~193쪽)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구억리에서는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에 평화협상이 열렸다. 김 익렬 회고록을 통해 본 협상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김익렬 연대장은 1948년 4월 28 일 정오 대정면 모슬포 연대본부를 떠나 회담 장소인 대정면 구억리로 가서 김달삼을 만났다. 김익렬은 우선 김달삼에게 ‘제9연대가 지금까지는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한다’며 회담이 결렬되 면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알렸다. 김달삼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약속이행 의 권한이 있느냐?’고 의문을 표했다. 이에 김익렬은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으 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 관의 결정’이라고 밝혔고, 김달삼도 ‘나도 제주도의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았다’고 밝힘에 따라 협상이 진행됐다. 김익렬과 김달삼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① 72시간 내 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 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는 것이었다. 또한 합의된 귀순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 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 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4시간에 걸친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밤늦게 제주읍으로 건너와 맨스필드에게 보고하자 맨스필드는 큰 만족감을 표했으며 자신이 요청한 대로 전 경찰에 대해 지서 밖 외부에서의 활동을 일채 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고 밝혔다. 그러나 협상 사흘 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