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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 제주4·3유적 Ⅱ_ 서귀포시편 살해됨 8월 미상일: 마을 소사였던 정우실(20대, 남)을 토벌대가 무장대 협조자로 오인해 총살함 11월 15일: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집에 있던 박인선(26, 남)을 사살함. 구장이었던 김태권(32, 남)은 군인들의 행동에 위협을 느껴 피 신하던 중 사살됨 1948년 11월 20일께 초토화작전으로 구억리는 전소됐다. 그 후 주민들은 대정 골과 하모리 등지로 소개해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연명해나갔다. 소개 생활 중에 도 구억주민들의 희생은 계속됐다. 윤경생(31, 남)은 11월 25일, 강오생(18, 남) 은 11월 30일 대정지서로 연행됐다 오오무라(大村) 병사로 인계된 뒤 12월 1일 모슬봉 서북쪽에서 총살됐다. 고태혁(19, 남, 대정중 학생)과 김유선(27, 남), 박 근양(26, 남), 박신학(37, 남) 4명은 12월 6일 벌어진 사만질 앞밭 학살사건으로 희생됐다. (보성·인성·안성리–학살터–사만질 앞밭, 참조) 그러다 소개된 지 1년이 지난 1949년 가을께부터 주민들은 구억리 복구를 위 한 축성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성은 구억리 본 마을(현 구억 상동)에 쌓는 것이 아니었다. 구억리가 경비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군당국이 구억리 본 마을에 서 2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구억리와 보성리, 안성리 3개 리 경계지역에 쌓도 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당시 성안에 들어간 지역은 안성리 상동과 보성리 상동, 구억리의 일부였고, 결국 이 지역이 지금의 구억리 하동을 형성하게 됐다. 이런 연유로 현재 구억리 하동이라고 통칭되는 지역의 가옥들 대부분은 행정구역상 안 성리 상동에 위치하게 됐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은 행정구역상 안성지역에 살 던, 보성지역에 살던 관계없이 과거의 구억리 번지를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특이 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1962년, 정부에서는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구억리 옛 마을 복구를 위 해 정착지원금을 지원하면서 이주 희망자 신청을 받았다. 당시 신청을 10세대만 받았는데 현재 구억리 상동에는 당시 입주했던 10세대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 현재 정부가 인정한 구억리 4·3희생자는 18명(남성 1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