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page


58page

군을 지휘하여 倭兵(왜병)과 탐관오리를 무찌르기 시작하였으니 그때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丙申(병신)에 의병을 이르켜 간첩 金奭中(김석중)등을 농암저자에서 梟示(효시)하고 堤川(제천)으로 옮겨 毅菴 柳麟錫(의암 유인석)에게 師事(사사)하고 그 幕下(막하)에 종사하여 적을 유격하였고 徐相烈(서상열)과 합세하여 새재의 적을 토벌하였으나 시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毅菴(의암)과 상의하여 遼東(요동)에서 군사를 길러 국내로 들어올 것을 결정하고 丁丑(정축)에 遼東(요동)으로 건너가 毅菴(의암)과 趙秉準(조병준)으로 더부러 通化(통화) 長白(장백) 寬甸(관전) 등지의 적을 섬멸하고 3년만에 돌아왔었다. 乙巳(을사)에 소위 五條約(오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군사를 이르켜 永春(영춘) 丹陽(단양)에서 적을 격파하였으니 白南圭(백남규) 金尙台(김상태) 河漢瑞(하한서) 尹基榮(윤기영) 邊學基(변학기) 申乭石(신돌석)등이 모두 합류하였다. 丁未八月(정미8월)에 국군이 해산되자 국내의 열두 의병대가 揚州(양주)에 모여 선생과 李隣榮(이인영) 閔肯鎬(민긍호) 許蔿(허위) 朴正斌(박정빈) 權重熙(권중희) 方仁憲(방인헌) 鄭鳳俊(정봉준)등을 각도의 倡義大將(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서울로 달려가 統監府(통감부)를 깨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선생은 江原道(강원도) 일대에 토벌을 계속하다가 戊申六月(무신6월)에 淸風(청풍) 금수산 기슭에서 적탄에 맞아 被執(피집)되어 서울 옥중에서 漢詩一絶(한시일절)을 읊고 팔역의 동지와 가족에게 告訣文(고결문)을 보내고 九月十九日(9월 19일)에 형을 당하였다.
58page

선생은 전후 十三년 동안 기호 영남 관동 요동등의 전투가 三十여회에 수많은 적을 무찔렀다. 十一月에 제천 北面(북면)에 權厝(권조)하였다가 甲申(갑신)에 李聖範(이성범) 李元宰(이원재)등이 尙州 化北(상주 화북)에 이장하였고 다음해에 祖國(조국)이 광복되고 1962년 壬寅에 정부에서 建國功勞重章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자는 樂寅(락인)이요 본관은 全州(전주)이며 세아들 承宰(승재) 兢宰(긍재) 明宰(명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