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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후기의병
고종황제의 의병 해산조치의 하달로 중단되었던 의병활동은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 제국이 일제의 반식민화되자 다시금 봉기하게 되었다. 을미의병이 화서학마에 의한 거의였다면 정미의병은 평안충과 해산된 군인들이 주도한 점이 특징이다. 1907년 11월초, 이민영 의진의 약 1천여명으로 시작하여 곧 허위부대 등 각지의 의병 부대가 합류한 결과 5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이 지평의 삼산리(三山里)에 집결하였다. 서울 진공작전을 목표로 전국 의진에 통문을 돌리고 작전을 개시하던 중 일본군이 이를 막고자 공격하여 삼산전투를 치뤘다.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양평지역의 유서깊은 사찰인 용문사 상원사 등이 불태워 지는 피해를 입는 등 일체의 강력한 탄압이 혹독했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의지는 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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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출신 주요 의병장
권득수(權得洙)
용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양평·양주·이천·지평 일대에서 200명이 넘는 의병진을 편성하고 용문사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놓고 활동했다.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일본 기병대에 발각되어 치열한 격전을 치렀으며 원주의병장 민긍호 부대를 비롯하여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인제군 일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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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金春洙)
홍천에서 창의하여 200여명을 인솔하고 양평·여주·광주일대에서 활동 했다.
이연년(李延季)
전기의병장 이승룡의 장자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자 의병장으로 추대받아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지평의 김춘수 의진에 합류하였다.
조인환(曹仁煥)
군대해산 직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거의하여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의진의 규모는 4백여 명에 달했고 지평군아를 공격하여 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박광천(朴光天) 안기영(安基永 안승우 子) 윤태훈(尹泰勳) 이성서(李聖瑞) 이재복(李再福) 정영운(鄭永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