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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한편 이 사건은 사건 발생 6일만에야 지방언론에 처음 보도됐다. í��제주신보��의 보도 내용이다. “1구서(1區署) 조천지서에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유치 중이던 동리 청년이 유 치장 내에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동 사망자는 조천면 조천리 하동에 주소를 둔 김용철(당년 22세)이란 청년인데,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경찰에서 수배 중이 었는데, 지난 3월 4일 미명 동면 대흘리 2구에서 피신 중이던 것이 경찰에 체포되어 유 치 중이었던 바, 6일에 이르러 돌연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당국에서는 이 보 고를 접하여 익(翌) 7일 채용병(蔡龍秉) 검찰관 지휘 하에 의사 장시영(張時英)씨 외 관 계관 등이 급거 현지에 출장하였는데 경찰감찰 부청장 박근용(朴根容)씨와 CIC 미인 (美人)도 동행 입회 하에 사체를 해부 검시하는 한편 사인에 대하여 면밀한 현장조사를 마치고 귀읍(歸邑)하였다는 바, 앞으로도 의사의 감정서에 의하여 조사를 계속하리라 하며 CIC에서도 검찰���국과 병행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2 정부의 보고서(150쪽)는 이 사건을 계속 설명해준다. 이 『제주신보』 보도 이전 부터 조천 지역은 김용철의 죽음이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알려져 민심이 들끓고 있었다. 경찰 측에서는 연신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둘러댔으나 시신 전체에 시커 멓게 멍이 들어 있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규명을 요구 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철저한 조사를 군정 당국에 요구했다. 이 조사는 검시의사 선정에서부터 잡음이 일었다. 경찰 측에서는 당시 제주도 청 보건후생국장 송한영 의사를 검시의사로 적극 추천했다. 그러나 송의사나 제1 구경찰서장 문용채, 수사과장 성범용, 그리고 사건을 유발한 조천지서 주임 조한 용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때문에 검찰당국은 검시의사로 제주출신 장시영을 선택 했다.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실시됐다. 1차 부검은 경찰측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끝났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미군 고문관은 재부검을 지시했다. 다음날 실시된 2) ��濟���新報��, 1948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