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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 조천면 5) 기타 <김용철의 묘> 가. 소재지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1152번지 가족 묘역 내 나. 개요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 (21, 남)이 고문치사했다. 당시 이 사건은 전 제주도민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사인규명을 위해 곧 검시관의 부검이 이어졌다. 그 결과, 사인이 고문치사로 밝혀 지면서 미군정 고문관이 직접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징계가 이어져 당시 조천지서장 조한용 등 5명의 경찰 모두에게 3~5년의 징역형이 언도됐다. 김용철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치러졌다. 동생 김용선(2002년 63세, 남)은 수백 개의 만장이 추도 물결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4·3의 길목에서 발생 한 이 사건은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 도피 입산하는 계기가 됐고, 도민들로부터는 경찰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149쪽)는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해방 이후 1947년 3·1사건 이전까지 경찰의 고문문제가 제기된 적은 없다. 그러나 3·1사건 이후 경찰의 고문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특별수사과의 강압적인 수 사기술은 공포대상이 되곤 했다. 응원경찰이 철수하면서 교체 경찰력으로 제주에 들어 온 철도경찰과 이북출신 경찰관들은 제주사람들을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시각으로 본 반면, 현지 주민들은 이들 외지 출신 경찰관들을 ‘육지 것들’이란 반감과 경원의 눈 초리로 볼 때가 많았다. 이런 심적인 갈등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면서 다양한 고문형태 로 표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