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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제주읍 활동하다가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통합됐다. 제주도에서는 1947년 11월 2일 제주극장에서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에 장 동춘(張東春), 부위원장에 박병준(朴炳俊)이 선출됐다. 서북청년회는 4·3을 거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단체이다.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 모두 그들의 횡포에 몸서리를 치며, 서청으로 인해 사건이 더욱 커졌다고 힘주어 증언한다. 서북청년회는 1947년 3월 총파업 직후 사퇴한 박경훈 도지사의 후임으로 부임 한 유해진 지사가 자신을 경호할 목적으로 10여 명을 대동하고 입도하면서 제주 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제주도는 서청에겐 붉은 섬으로 낙인 찍혀 있어 확 쓸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좋은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후 서청 은 민간인 신분으로, 혹은 군경토벌대원으로 속속 입도했고, 그들로 인한 피해 또 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4·3이 발발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이들의 횡 포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을 제지할 세력이 없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은 이들의 횡포를 보고도 의도적으로 방관했다. 서청의 악행은 끝이 없었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청(濟州道廳)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김두현 총무국장은 서청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 피살됐다. 서청은 사고 직후 미군 CIC(현재 로베로 호텔 동쪽 주차장에 사무실이 있었음)에 “사상문 제로 그를 조사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실상은 보급품 배정에 불만을 품은 서 청의 집단폭행으로, 나중에 이 일로 처 벌받은 서청단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서청은 1948년 12월 25일, 제주도의 유일한 일간지였던 제주신보를 강탈해 그 후 1년 3개월 간 자신들의 기관지 로 직접 발행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 본부 옛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