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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전기의병
일제에 의한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와 그해 11월 단발령의 공포 후 지평출신의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거의하였다.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을 창의하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원주관아와 제천관아를 잇달아 점령하고 단양의 장희협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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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출신 주요 의병장]
이춘영(李春永)
지평출신이며, 선배인 안승우의 부친 안종응으로부터 거의를 권유받고 김백선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지평의병을 의거하였다. 의병부대의 중군장이 되어 단양의 장회협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안종응(安鍾應)·안승우(安承禹) 父子
뛰어난 학자였던 안종응은 아들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의병 거의를 권고하고, 포군 김백선을 의병부대에 끌어들였다. 아들 안승우는 군용을 정비하고 친일 매국 역당의 앞잡이 무리와 혈전을 겨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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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선(金伯善)
안승우와 합세하여 지평의병을 거의하였다. 선봉장이 되어 단양전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승룡(李承龍)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양근에서 의병을 모아 전술훈련을 시키고 양근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에서 주력 부대로 활동하였다.
손덕화(孫德化)·손용문(孫龍文)父子
손덕화는 유인석 의진에 참여하여 충주성 전투에서 적과 싸웠고, 그 후 제천에서 다른 의병들과 집결하여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는 가흥(佳興)을 공격하는 가운데 전사하였다. 그의 어린 아들 손용문(孫龍文) 또한 초산(楚山)전투 때 2백여 리 밖에서 달려와 적군의 공격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어 유인석 의진의 승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김성화(金性化), 김재관(金在觀), 임을선(林乙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