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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선거리로 약 8㎞ 정도 떨어진 고평동은 인근 교래리와는 두 참가량(약 4㎞)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때문에 교래리가 1948년 11월 13일 군토벌대에 불시에 초 토화되자 같은 날 고평동도 불태워지고 주민들은 소개됐다. 이날, 고평동 주민들은 토벌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불을 지르는 바람에 해안마 을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산으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급한 대로 인근의 궤나 곶자왈에 몸을 숨겼다. 그 후의 삶은 토벌대를 피해 여기저기 숨어다 니는 생활의 반복이었고, 어쩌다 토벌대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현장에서 총살되기 일쑤였다. 1949년 봄, 토벌대의 권유에 따라 살아남은 주민들은 귀순했다. 그러 나 이들 중 일부는 타지방 형무소로 보내졌고, 한국전쟁 후 행방불명됐다. 1949년 봄, 살아남은 주민들은 대흘국민학교에 성을 쌓고 함바집을 지어 주변 마을(와흘1구와 대흘, 와산, 교래리) 사람들과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1952 년, 와흘1구를 포함한 인근 마을이 재건돼 그곳 주민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 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있었던 와흘2구 고평동과 수기동에는 재건의 손 길이 미치지 못했다. 와흘2구 주민들은 살던 대로 대흘리에 눌러 살거나 타 지역 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1957년 고평동에 복구허가가 나오자 10 여 가호의 주민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도 얼마 살지 못하고 대부분 마을을 떠나버렸다. 2003년 조사 당시 이곳 고평동에는 원주민으로 유일하게 김동규(2003년 67세, 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소개 당 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중산간 사람 들은 무조건 폭도 취급했어. 교래리에서 9연대 군인 13명이 오더니 싹 다 불태 웠지. 2개 분대 정도 됐어. 그때쯤에는 산사람들이 약하긴 약했던 모양이라. 군 인 13명을 못 당했으니까. 그때 요행히 살아난 사람들도 조사 받아서 죄가 없으 면 살고, 산에 자식이 올라가든지 해서 고평동 마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