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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25년 6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주모자이자 현장 지휘자로 밝혀져, 궐석재판 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19년 7월경 윤치형과 만주로 탈출하였다.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쿠산쯔(孤山子)로 가서 신흥 무관학교의 속성과정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 다. 지린에서 김원봉과 만나 비밀결사 조직 준비에 동참하였고, 동향선배 황상규의 지도 로 1919년 11월 10일 창립된 의열단(義烈團) 의 단원이 되었다. 창단 직후 의열단이 추진한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 거사에 가담키 위해 1920년 3월 경 밀입국하였다. 서울 교남동의 한 여관에 은 신하던 중, 밀정의 제보로 6월 20일경 이성 우·황상규와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혔다. 이 어서 10여 명의 동지들도 붙잡히고 폭탄 16 개도 압수되어, 의열단의 ‘제1차 국내의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궐석재 판 선고형이 가산되어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 고를 겪었다. 1927년 2월 7일, 감형과 특사 조치로 풀려나 귀향하였다. 이후 이름을 ‘소 룡’이 아닌 ‘세주’로 썼다. 중국 국민정부 지원 간부 훈련단 교관 등 활동 1932년 10월 의열단이 중국국민당 삼민주의역 행사(三民主義力行社, 속 칭 남의사[藍衣社])의 지원 으로 난징 교외 선사묘(善 寺廟)(혹은 선수암[善壽庵])에 설립한 조선혁 명군사정치간부학교(통칭 의열단 간부학교) 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3년 3월 졸업 하고, 6월 말의 의열단 정기대표대회에 참석 하였다. 동년 9월부터 장수성(江蘇省) 캉닝현 (康寧縣) 증조사(曾祖寺)에서 6개월간 운영된 제2기 정치과 교관으로 의열단사·조선운동 사·각국 혁명사·중국혁명사·유물사관·당조직 문제 과목을 강의하였다. 1935년 늦가을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 州)로 가서 민족혁명당 선전활동을 펼쳤다. 1937년 1월의 제2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 앙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고, 신설된 자금위 원회 주임직도 맡았다. 1937년 11월 난징(南 京)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될 때 5인 간사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1월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 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싱쯔(星子)분교에 서 특별훈련반 제6기의 조선학생대 정치교 관이 되어, 5월까지 한국독립운동사를 강의 하였다. 이때 항일가요 「최후의 결전」을 작 윤세주(당시 이름 윤소룡)의 의열단 활동 관련 경성 지방법원의 재판 판결문(1924.5.13., 국가기록원 제 공) 조선의용대 대원들 앞에서 연설하는 윤세 주(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