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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근무를 서다 무장대의 습격에 희생된 이도 있었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돼 수용소에 갇혔다 집단학살된 집안도 있었다. 한편 와흘 출신으로는 김의봉(1923년생)이 유명하다. 그는 1947년 24세의 나 이로 도내 최연소 구장으로 뽑혀 일했다. 나중에는 조천지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 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입산해 무장대로 활동했고, 1953년 4월 15일 와흘리 부 근 산록에서 경찰 유격대에 사살됐다. 1 그에 대한 많은 일화가 조천면 일대에서는 지금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4·3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와흘 주민들은 1949년 봄, 대흘국민학교 함바집에서 대흘리, 와산리, 교래리 주민들과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3년 가 까이 고생하며 지내다 1952년에 들어서야 고향 마을로 돌아와 성을 쌓고 마을을 재건할 수 있었다. (조천면-대흘리-역사현장-대흘국민학교, 참조) 현재 와흘 2구 인 고평동 옛터와 수기동은 재건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중 고평동은 요즘 들어 식당가가 형성되고 새로운 전원주택지가 조성되면서 외지 인들이 선호하는 자연마을로 부각되고 있다. 다음은 와흘리 주요 사건이다. 1948년 5월 20일: 고태문(21, 남)은 와흘리 첫 희생자로 김녕리 인근에서 총살됨 10월 26일: 김기윤(45, 남)은 신촌리 윗 지경에서 소 물을 먹이다 총살됨 11월 11일: 박유행(77, 남)은 토벌대의 마을 전소 시 불에 타 사망함 11월 13일: 수기동 11명, 고평동 9명, 본동 3명, 다른 마을 4명 등 다수의 마 을주민이 총살됨 (와흘리-잃어버린 마을-고평동·수기동, 참조) 12월 21일: 자수사건 연루자들, 박성내에서 집단학살됨. 희생자는 행불자 문명선(32, 남) 등 6명과 형무소 행불자 김상봉(19, 남) 등 4명 을 포함해 총 39명에 이름 (아라리–학살터-박성내, 참조) 1949년 1월 22일: 송태숙(25, 여) 가족 3명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조천지서 부 근 밭에서 총살됨 1) 『제주신보』 1953. 4. 17., “재작(再昨) 15일 밤 경찰유격대에서는 적의 주력부대를 포착하고 수괴 김의봉(金義奉)과 중요 간부 강봉오 외 여비 1명 사살의 대전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