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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나. 개요 북촌국민학교는 1949년 1월 17일, 4·3 시기 발생한 여러 사건들 중 가장 비극 적인 사건인 북촌대학살사건이 시작된 장소이다. 이날 아침,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 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 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리고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쯤 되는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그때 시각은 오전 11시 전후.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 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병약자 할 것 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학교운동 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00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 로 변했다.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1,000명 가량의 마을사람들은 공포에 떨 었다. 교단에 오른 현장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장운관)를 나오도록 해서 ‘마 을보초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켜 갔다. 그런 다음 어린 학생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 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들을 몇 십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 하기 시작했다. 이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을주민들은 이 날 희생된 주민들이 대략 300명에 이른다고 증언 한다. 한편 사살중지를 명령한 대대장은 주민들에게 다음 날 함덕으로 오도록 전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다음날 산으로 피신한 사람, 함덕으로 간 사람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대대장의 말대로 함덕으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이가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다시 학살된다. 이 사건으로 북 촌마을에는 대가 끊어진 집안이 적지 않다. 마을에서 아이고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1954년 1월 23일 벌어졌다. 한국 전쟁 전몰장병인 김석태(金錫泰)의 고별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날 주민들은 국민 학교 교정에서 전사자의 고별식과 꽃놀이를 하던 중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소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