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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서귀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남로당 서귀면위원회 당책을 지냈다. 그는 1947년 4월 18일, 3·1절 기념집회와 총파업 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제 주지방심리원에서 벌금 2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4·3이 발발하고 군·경의 탄 압이 심해지자 그는 1948년 11월 15일께 자택 동쪽 30m 지점에 토굴을 파 숨은 후 1954년 3월 26일 경찰에 발각돼 체포될 때까지 무려 7년 동안 은신해 생활했 다. 그의 당시 은신생활은 지금도 신화처럼 얘기된다. 동아일보(1954.4.4.)는 ‘만 7년만에 체포’라는 제목으로 이도백의 검거를 대서 특필했다. “4280년 4월 3일 제주도 이단에서 일어난 세칭 ‘4·3반란사건’의 뼈저린 기억은 아직 도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거니와 동 폭동을 일으킨 후 월북 도주한 것으로 전하여졌던 동사건의 주모자 중 1명이 사건 발생 후 만 7년 만에 이번 우리 경찰에 체 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한 수사관계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문제의 적색마 의 1인 이도백(45)은 거월 25일 제주도 내 서귀포에 있는 ‘비밀토굴’ 속에서 서귀포 경 찰서원에게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목격한 바 있는 전기 수사관계자가 말하는 바 에 의하면 이가 잠복하고 있던 비밀 ‘아지트’는 이의 본가에서 바로 약 15미터 가량 밖 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 「비밀토굴」은 널따란 고간(庫間) 뒤에 보이 지 않게 꾸며진 출입구로 통하게 만든 지하실이 있으며, 따로 이 뒤에는 음식물을 넣어 줄 수 있는 비밀창구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기 이의 가족은 거의 처형되고 본가에다 그동안 李의 조모와 6세가량 되는 남아만이 살고 있었다고 하며 이들의 연락 과 음식물 차입으로 이는 연명해온 것으로 보이고 있는데 피검 당시 이의 머리는 상당 한 길이에 달하였고 얼굴 빛깔은 창백할 대로 창백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직접 목격한 전기 수사관계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의 머리나 얼굴 빛깔로 보아 이가 장시일 토굴생활을 한 것만은 인정할 수 있었으나 7년간 그대로 토 굴 속에만은 있은 것 같지는 않고 간혹 사람의 눈을 피하여 밖에 나와 다닌 일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 이는 피검 후 연일 서귀포경찰서에서 준렬한 문초를 받고 있다 고 하는데, 사건 발생 후 7년 만에 체포된 이에 대하여 서귀포 일대 지방민들의 화제는 집중되고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