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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40여 명은 현장에서 총살됐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반못에서 GMC에 실려 함덕 대대본부로 이송됐다. 주민들은 그날 눈이 엄청나게 내려쌓였다고 회상한 다. 선흘리 노인회관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굴 안에서 깨진 유리에 찔려 발바닥 에 피가 흥건했었지. 그래도 우린 그 쌓인 눈 속에서 맨발로 반못까지 걸어갔고, 함덕 군부대까진 제무시 타고 갔어” 기억했다. 선흘 주민들은 함덕국민학교의 3대대 군인들이 임시로 설치한 천막에서 하룻 밤을 지냈다. 다음날부터 젊은 남자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됐다. 고문을 받고 선흘 주민들과 함께 있던 안창해가 군인에게 사정했다. “잘못은 우리가 헤시난 죄 없는 여자와 아이덜은 살려줍서!” 그러자 군인이, “잘못한 줄은 아느냐! 다 죽일거다” 며, 몸이 꽁꽁 얼어붙은 안씨를 군화발로 걷어찼다. 군인의 고함에 아이와 여자들 의 울음이 터졌고 곧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 붙잡힌지 이틀 후인 11월 28일 오전 10시께, 제무시(GMC) 한 대에 꽁꽁 묶인 선흘 주민들과 여기저기서 붙잡혀온 사람들이 빽빽이 올라탔다. 어떤 증언에는 그 수가 100명이 되었다고 했다. 4 차는 선흘리 못 미친 억수동 인근으로 갔다. 그 리고 군인들은 차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 총살했다. 이날 16살 먹은 고 진배만 무사했다. 그는 엔진을 식히려 물을 뜨러 갔다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남편 안창휴를 잃은 조명옥(2003년 82세) 할머니는, “남편이 죽었다 4) GMC에는 과연 몇 명이 탈 수 있을까? 4·3 증언에는 GMC를 의미하 는 제무시 차량 얘기가 종종 나 온다. 위의 ‘제무시 한 대에 100 명은 태우고 갔다’는 증언 이외 에도 아주 많은 얘기들이 있다. 1950년 예비검속 당시에도, “제무시 열두 대에 사람들을 빽 빽이 태우고 갔다.” “그 제무시 가 정뜨르비행장으로 갔다” 는 증언이 있다. GMC는 1940년대 초 미국 제너럴모터스가 생산한 트럭으로 한국에는 해방 후 미군들이 들여왔다. 위쪽 사진의 GMC에는 16명의 미군이 군장을 하고 타고 있다. 당시 이런 사진들을 종합해보면 GMC 한 대에 빽빽이 사람들을 태우면 40명 정도는 태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위의 증언 “GMC 한 대가 갔고 거기 100명이 탔다”는 것은 지나치다. 1950년 7월, GMC에 탄 미군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중앙일보 2010. 11. 23.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