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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나창헌 선생 53 김형기 등에게 도쿄 유학생의 움직임을 구체 적으로 전달하면서 학생계의 만세운동을 추 진하였다. 1919년 2월 26일 정동교회 이필 주 목사 집에서 김문진·윤자영 등 전문학교 학생대표들과 함께 모여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제2차 만세시위 계획을 세운 뒤, 만세시위 이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 의하였다. 이후 3월 1일 거사일에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2차 시위를 준 비하던 중 3월 2일 운니동 하숙집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의친왕 이강 망명작전 추진 1919년 7월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탈출하여, 비밀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의 정남용과 연 결되어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그는 상하이 에서 파견된 이종욱·송세호 등과 함께 대한 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실행에도 힘 을 쏟았다. 1919년 7월 안창호의 주도로 시 행된 연통제는 도·군·면의 행정조직에 따라 전국 각도에 감독부를 두고, 군에 총감부, 면 에 사감부를 두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대동단의 청년단 대표를 맡는 한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하이(上海) 망 명과 함께 제2회 독립만세시위 계획에서 주 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동단은 대한제 국 황족인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을 통해 거족적 만세시위를 일으켜 독립운동의 분위 기를 고조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제1단계로 1919년 10월 10일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해 외 망명을 성공리에 거행한 뒤, 그 해 11월 이강의 해외망명을 시도했으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가 처음에는 안창호가 주도하는 지방선전부 설치에 적극 적으로 참가했지만, 임시정부의 분파와 분열 에 실망하고 ‘재건 대동단’과 철혈단(鐵血團) 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재건 대동단이란 앞서 망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앞세워 1920년 3월 상하이에서 재건한 대동 단 본부였다. 대동단은 통고문과 포고문 등 을 통해 독립전쟁을 선포하면서 무장투쟁노 선을 천명하였다. 무력투쟁 중심의 철혈단·병인의용대 결성 1922년 11월 김구·여운형·조동호·최석순· 이유필·조상섭 등 20여 명과 함께 한국노병 3·1운동 때 체포된 나창헌의 경성지방법원 재판 판결문(1919.8.30, 국가기록 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