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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권오설 선생 53 조선공산당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임시상 해부’와 연결되어 1926년 4월 말경 메이데이 (5월 1일) 기념 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때 만 세운동 계획이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인사 들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추진되었다. 당시 이들은 순종(융희황제)의 국장(國葬)을 사회 주의운동 선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 고 있었다. 권오설이 1926년 5월 1일 상주(喪主) 복 장으로 변장한 뒤 국경을 넘어 중국 안동현 (安東縣, 현재 단동시) 역전에서 김단야와 만 나 계획을 밀의하고 돌아와 만세운동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또 이준태를 통해 1926년 5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의 찬동을 얻어냈다. 조선공산당은 대중 시 위를 3·1운동 때와 같이 전 민족적인 운동으 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 · 민족주의 · 종교 계 · 청년계 · 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 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조직’을 구상하였다. 즉 6·10만세운동의 중 심체로서 대한독립당을 내걸었다. 만세운동 준비는 각 방면에서 6월 초까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6월 초까 지 상하이에서 보내주기로 한 자금이 지연되 면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6월 4 일 격문이 우연히 일제 경찰에 노출되면서 격문을 보관하던 개벽사가 급습당하고 천도 교 관계자들이 체포되었다. 권오설은 6월 7 일 서울 장사동 집에서 체포되었지만, 일제 검거망을 피한 학생들에 의해 거사 당일인 6 월 10일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출옥 을 얼마 앞둔 1930년 4월 17일 옥중 순국하 고 말았다.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권오설의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 대상 인물 카드」)  권오설 등 조선공산당 피고인 5명이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종 로경찰서 고등계 경부 등 5명을 고문혐의로 옥중 고소했다는 내용을  1개면 전체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1927년 10월 17일자  기사(경향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