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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5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1924년 4월 경성(서울)의 조선노농총동 맹 창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일약 조선노농총동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 상하였다. 노농총동맹은 가입 단체가 260여 개, 회원 5만 3,000여 명으로 전국적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인쇄직공조합과 철공 조합 등 각 방면 노동조합 결성에 앞장서 노 농운동의 지도자로 역량을 발휘하였다. 7월 13일 시천교당에서 인쇄직공 150명이 참가 한 가운데 인쇄직공조합을 창립하고, 철공소 직공을 규합해 서울철공조합을 조직, 1925 년 3월 박래원을 통해 경성인쇄직공조합과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1924년 6월 7일 언론기관을 포함해 31개 단체의 대표 100여 명이 서울 시내 수표정 (水標町) 조선교육협회에 모여 ‘언론집회압박 탄핵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기초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화요회의 김찬· 조봉암 등과 함께 혁청단에 가입해 이 해 11 월 이후 혁청단을 화요회 계열의 사상 단체 로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풍산소작 인회 대표로 상경한지 불과 1년 남짓만에 노 농운동계뿐 아니라 사회·청년학생운동계에 서도 지도적 위치를 굳혔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6 · 10만세운동 주도 1925년 2월 김재봉의 하숙에서 김찬·김재 봉·조봉암·박헌영·김단야 등과 조선공산당 의 창당 결의 모임에 참석하였고, 같은 해 4 월 창설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부를 맡았 다. 1차 고려공산청년회 시기 주로 청년·학생 들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회원들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유학에 적극 힘을 쏟았다. 1925년 11월 22일 1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간부가 대 거 체포되는 상황에서 박헌영에 이어 고려공 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해외로 망명한 김찬·김단야 등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이 준태와 함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를 장악하고 있었다. 6 · 10만세운동 격문을 인쇄한 감고당 (국가보훈부 제공) 순종황제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 · 10만세운 동. 일제 경찰이 서울 동대문 부근에서 민중 을 통제하고 있다(경향신문 제공). 6 · 10만세운동 관련 조선공산당 등 보도 기사 (『시대일보』 1926년 6월 19일자,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