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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권오설 선생 51 하였다. 1919년 그곳에서 3·1운동에 참가했 는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9년 말 출옥 후 고향에 돌아와 이듬해 에 풍서 가곡동에 원흥학술강습회를 창설하 고,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 람들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원흥학교 교장을 맡아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한편 인근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 일직서숙(一直書 塾)·오릉의숙(五陵義塾) 등을 창설하였고, 예 천 은풍, 안동 임동·금계 등지에 강습소를 설 치하며 교육 활동을 펴나갔다. 1922년 8월에 는 안동 지역 30여 개 학술강습소, 개량 사숙 의 통합을 위한 안동강습회연합협의회의 결 성을 주도하였다. 학술강습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1920년 초기부터 안동청년회·일직금주회 등 청년운동과 사회 계몽에도 힘을 쏟았다. 사 회 일반의 풍기를 개선할 목적으로 1920년 9 월 4일 일직금주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아 사회계몽에 앞장섰다. 1920년대 사회운동의 전개 1920년 가곡(佳谷)농민조합을 조직하는 한편 이준태와 함께 같은 해 9월 조선노동공 제회 안동지회 설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안 동의 지역운동이 중앙과 연결될 수 있는 기 반을 마련하였다. 1923년 11월에는 무산자동맹회의 이준태· 김남수 등과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면서 본 격적인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풍산소작인 회 창립총회는 풍산학술강습소에서 소작인 2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풍산소작인회 는 급속히 조직이 확대되면서 회원이 5,000 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풍산소작인회의 조 직 기반은 1924년 4월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서울로 올라와 일약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권오설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 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오마이뉴스 권우성 제공) 안동시 풍서면 가곡리에 있는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紀 蹟碑)’(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