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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씨대종회보 42호 29 그 후, 엄흥도 충신은 1685년(肅宗 11)에 창절사(彰節祠)에 배향(配享)되었고, 1698년에 장 릉(莊陵)을 추봉(追封)할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추증(追贈)되고, 1726년(영조 2) 청주 (淸州) 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웠다. 1759년(영조 35) 그의 고향인 영월로 정려문을 이건(移建 ) 하였 고, 1969년에 정려각이 훼락(毀 落) 해지자 영월읍 영흥리 1069번지에서 장릉 화소(火 巢) 안 으로 옮겨 건립하였다. 이때 엄병섭(嚴柄燮)의 요청으로 안영호(安永護)가 글을 짓고, 엄 재숙 이 글씨를 써서 정려각에 판각하여 게시하였다. 1743년 공조참의(工曹參議)로 1758년 에 공 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하고 사제(賜祭)를 하였다. 단종이 비명에 간 뒤, 영월군수로 부임하는 이들이 연이어 횡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사 람들 은 노산군의 묘에 제향을 올리지 않아서라고 쑥덕였다. 1541년 9월에 박충원이 영월군 수를 자청하였다. 이전에 부임한 군수 박세호(朴世豪)는 1년 만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 . 다른 군수 권수중(權守中)은 나흘 만에 세상을 떴다. 연현령(延玄齡) 군수 또한 1541년(중종 36년) 6월 24일에 부임해 7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화홍련의 사연을 듣기도 전에 혼령을 보고 놀라 죽은 사또 이야기와 닮았다. 그들도 단종 의 원혼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박충원은 달랐다. 군수들의 연이어 급사한 것을 알고 단종의 능을 찾아가 '왕실의 맏아드님 어린 나이 보위에 올라, 때마침 비운 만나 두메 고 을 내 치었소, 한 조각 푸른 산에 만고의 고혼 슬프구나, 임이시여 강림하시어 이 술잔을 드옵 소서.' 라는 제문을 짓고 묘소에 정성스레 제향을 올렸다. 군수 박충원 이후로는 계속해 이 제문을 축문으로 사용하였다. 정성을 다한 위령 덕이 었는 지 그는 재임 6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냈고 고을도 평안했다. 그는 훗날 예조판서, 이조 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영월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하여 박충원을 칭송하고 생사의 경계를 넘어 생생히 살아 있는 단종의 영험함 또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살아서 서러운 삶 죽어서 태백산 산신 되어 영월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은 백마를 타고 속세를 떠 나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까지 영월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영월 상동 고 을에 단종과 엄흥도, 이야기로 되살아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