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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영월엄씨대종회보 42호 었다. 단종은 읍내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겼으나 결국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1457 년 10 월 24일의 일이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들고 관풍헌에 이르렀으나 차마 들어가지 못하자 주위에서 사약을 올릴 것을 재촉했다. 왕방연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 운데 엎드려 사약을 바쳤다. 단종은 한때 일국의 왕이었지만 어린 나이로 죽음 앞에서조 차 담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이 머뭇거리자 공생 복덕이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등 뒤 에서 활줄로 목을 잡아당겼다. 짧은 생은 그렇게 모진 손길에 끝을 맺었다. 단종의 나이 17세 였다. 자신의 입신을 위해 왕의 생명을 가차 없이 끊어버린 공생은 미처 관풍헌 문밖을 나서 기도 전에 아홉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즉사했다는 이야기가 숙종실록에 전한다. 꽃잎처럼 붉게 피어난 충절의 고장 대역죄로 죽은 단종이었다. 장례는 사치였다. 시신은 동강에 던져졌다. 역적의 시신에 손 을 대는 자는 3족을 멸한다는 겁박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때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 興道) 가 나섰다. 주위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말렸지만 “옳은 일을 하다 그 어떤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 라는 말을 남기고 아들 3형제와 함께 시신을 수습한 채 지게에 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 해 엄 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으로 올라갔다. 이때 노루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달 아났 다. 노루가 앉아있던 자리에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관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 려고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충신은 그곳에 단종 시신을 몰래 매장하였다. 단종의 죽 음이 전해지자 그를 모시던 시녀와 종인(從人)들은 동강(東江) 절벽에 몸을 던졌다. 오늘날 영 월 금 강정 뒤 언덕에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민충사(愍忠祠)’가 있고, 그 위쪽 절벽 위에 시녀 들이 꽃처럼 몸을 던진 ‘낙화암’이 있다. ▲ 충신 엄흥도 정려문(忠臣嚴興道旌閭門), 1833년(순조 33) 기 고